홍시(紅枾)

겉보리 서 말과 처가살이

by Morpheus

가을 하늘이 높고 가이없다.

옥색 모시 치마저고리 입은 여인처럼 단아하다.


티 없이 정결한 하늘가에 조롱조롱 달린 홍시(紅枾)는 외할머니 장죽 꼭지 속의 담뱃불 같이 새빨갛다.


말랑한 홍시를 쪼아 먹다 들킨 열쩍은 까치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라 옥빛 하늘가에

숨어버린다.

느티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외갓집의 솟을대문은 낡았지만 높았고, 동구 밖에서 보아도 고래등 같은 안채와 사랑채는 부유해 보였다.


토지개혁 이전에는 외갓집 땅을 밟지 않고는 읍내로 나다니지 못했다니 그 가세(家勢)를 어림할 수 있었다.

너른 들판이 탁 트인 대청마루에는 외할머니가 장죽을 물고 머슴들을 부리셨다. 장죽 꼭지로 놋재떨이를 "땅땅" 치면 머슴들이 굽신거렸다.


이모 넷과 외삼촌 둘을 두셨는데 큰외삼촌은 중앙 관직과 지방고관도 지내셨고 이종 사촌 중에는 수학천재도 있었다.

외갓집 자랑을 하는 게 전혀 아니다.
엄니는 딸 중에 막내로 외할머니가 제일 괴셨단다. 글만 좋아하신 가난뱅이 선생님을 만나 한 집 건너 초가집에서 초라하게 살았다.


처남 남매지간에 유정(有情)할 수도 있었겠으나 두 집은 냉랭했다. 가세 차이가 엔간했어야지..


막내딸 델고가서 고생시킨다고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지..



홍시가 익어가는 늦가을에는 아버지는 긴 장대로 홍시를 땄다.


초가집 앞뒤 마당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홍시 중에 제일 좋은 놈을 골라 외할머니 갖다 드리라고 했다. 부잣집 딸 데려다 고생시킨 변변찮은 사위의 속죄제물(贖罪祭物)로 잘 익은 홍시가 안성맞춤이라 요량하셨을 테지..

가을볕이 쨍쨍 드는 대청마루에 앉아 이빨이 하나도 없어 홍시를 오물거리시던 외할머니 모습 넘어 부잣집 외가 옆에서 처가살이 하면서 속으로 전전긍긍하셨을 아버지의 고단함이 겹친다.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 한다." 라고 투덜대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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