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vie à Paris, puis le départ(b)
"La façade de Paris n'est pas Paris."
파리의 겉모습이 파리가 아니다..
파리에 살면서 파리의 겉모습 (Façade)만 부러워하고 흥분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토록 부러워하는 파리와 프랑스의 약사(略史)라도 들여다보았는가? 이 아름다운 파리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에서 유래한 나라들의 이름과는 달리 파리나 프랑스의 이름은 실제 그 땅을 지배한 민족의 이름이었다.
Paris의 도시명은 서울의 여의도 같은 센강의 시떼섬(La Cité de la Seine)에서 거주하던 켈트(Celte) 족의 부족인 Parisii에서 유래되었다.
프랑스는 AD 5세기 경에 북쪽의 게르만족 계열의 프랑크(Francs) 족이 내려와 지배했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는 같은 민족계열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독일은 민족 언어 문화 모두가 게르만민족에 속하지만 프랑스의 민족 일부의 이름은 게르만이지만 언어와 문화는 라틴계다.
켈트의 부족 파리시이(Parisii)가 시떼섬에 거류하기 시작한 시원(始原)은 BC 5세기다.
역사가들은 프랑스는 "켈트의 땅에서 로마의 언어와 문화를 입혀 프랑크(Francs)의 이름으로 완성된 나라" 라고 기술하고 있다.
파리 입성 첫날 색다른 환영을 제공한 Rue de Trévise의 개ㄸ으로 지저분했던 골목길도 파리 행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도로 양면에 설치된 수도로 말끔히 씻은 자태로 손님을 받을 준비를 갖춘다.
외국의 도시에 상륙하면 교통수단이 첫 접촉 지점이 된다. 1981년 당시에도 파리의 지하철은 익히 들었으나 놀랐다. 메트로역 중심으로 5분 이상은 걷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중심지역 내에서다.
부산 지하철 건설 전 벤치마킹한 파리의 MTR 측의 브리핑을 들었다. 그렇게 가능한 배경이 파리의 지질이 화강암이 아닌 모래와 석회암이라서 굴착과 지지대 설치가 용이하다고 했다.
런던(1863)보다는 늦었지만 1900 년 만국 박람회에 맞춰 개통(Vincennes-Maillot) 이 있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청량리)이 1974년 개통되었다.
파리의 석회암 지층 때문에 파생된 문화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아파트 화장실 변기 옆에 변기보다 작은 욕조 같은 게있어 용처를 몰랐다.
거기에 물을 받아 머리도 감고 발도 씻었다. 알고 보니 비데였단다. 석회질 물은 비누도 잘 풀리지 않고 머리에 석회가 남아 목욕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체취(體臭)는 향수의 발달을 가져왔다.
유리컵에 물을 받아놓으면 아침이면 하얀 앙금이 소복이 가라앉아 있었다. 석회였다.
당시에 Portable Water에는 에비앙 (Évian), 비텔(Vittel), 볼빅(Volvic) 세 종류가 있었다. 페리에(Perrier)는 탄산수다.
에비앙(Évian)은 알프스의 눈과 빙하가 녹은 물로 지층을 통과하면서 미네랄이 적고 균형을 이루고 있어 아기들 분유 타는 물로 권장되고 있었다. Volvic이나 Vittel 보다 비쌌다.
Paris, 이 아름다운 도시는 어떻게 항상 같은 모습으로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일까?
당시 사무실 옆에 유명한 실존 인물이 살았던 저택이 있었는데 카페로 사용되고 있었다. 문지방이 부서져서 수리를 해야 하는데 몇 개월이 걸렸다. 그 건물이 보호대상이라서 수리 시 100% 원형복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파리는 파사드(Façade) 수리 보수를 10년마다 의무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벽을 씻어내고 지붕을 원형에 맞춰 칠을 해야 한다. 건물의 외관을 훼손하는 어떤 행위도 허용치 않고 있다.
앞으로 몇 세기가 지나도 지금의 파리의 Façade는 변하지 않을 거란다.
프랑스의 국가 이념은 자유( Liberté) 평등(Égalité), 박애 (Fraternité )다.(終)
♤다음 편은 "Hong Kong Again"이 발행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