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따라.. <24>

상해(上海), 상하이 상하이(e)

by Morpheus


이른 봄 상해(上海)의 도심을 벗어나 태양도(太陽島) 골프장으로 가는 길 주변에 끝없이 펼쳐진 공장들의 광경은 놀라웠다. 공장 지대를 벗어나면 또 한 가지 장면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유채꽃 벌판이다.
노란 유채꽃 파도가 지평선을 이룬다. 제주 한라산 언저리의 유채꽃은 손바닥 보다 작다. a 튀기고(炸) b 볶는(炒) 중국요리의 근간 (根幹)이 되는 유채화(油菜花)인 것이다.

1990년대 말 외국인의 눈에 보이는 상하이(上海)의 분위기는 마치 급류를 항해하는 배(船) 같았다. 흔들리며 급히 전진하는 시간의 항해(航海)였다.
아침과 저녁이 달랐고 오늘과 내일이 같지 않았다.

회고컨대 1990년대 상하이(上海) 지역에 초기 투자는 홍콩(香港)과 타이완(臺灣) 등 화교(華僑)자본이 주도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낮은 이점을 살려 초기에 전자부품, 플라스틱, 섬유, 기계가공 기업들이 상하이 (上海) 외곽지역과 장쑤성(江蘇省) 저장성 (浙江省)의 송장(松江), 자띵(嘉定),
칭푸(靑浦), 쿤샨(昆山) 등지에 대규모 단지를 세웠다. 소위 "타이완 공장 벨트" 라고 했다.

당시 홍콩과 타이완의 화교 기업인들은 사업의 성패를 떠나 그들의 상하이(上海) 에서의 삶은 풍요로웠고 자유분방했다.


골프 코스가 충분치 않았던 당시의 클럽 하우스는 중국어 사용자들이 넘쳤고 어쩌다 그들의 앞 조(組)나 뒤에서 골프를 치게 되면 소란스러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국의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상하이(上海)와 쑤저우(蘇州) 지역으로 진출했다. 공장설립에 대한 우혜 조건이나 인건비에 있어 국내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경쟁력이 있었다.



중국 현지인들에게 한국 기업들의 처우는 높은 선호도를 보였다. 한국의 자동차, c수기 (手機) 등 한국제품들도 언제나 버킷 대상이 되었다. 물론 중국 진출에 실패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당시의 상하이(上海)의 주택 부족문제가 심각했고 특히 외국인들을 겨냥한 부동산 개발이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일어났다.


한국의 주재원들도 아파트와 골프클럽 회원권을 취득하는 붐이 일기도 했다. 토지의 국유화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소유 목적이 아닌 투자임을 알았다.

상하이(上海) 지역이 외국기업의 투자가 확대됨에 따라 일자리를 찾아 인근 지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농촌 지역인 안후이성(安徽省) 사람들이 많았다. d안휘성방(安徽省幇) 출신이란 말도 생겼다.

주택 부족으로 생긴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지 않은 얘기를 하다가 현지인 직원에게 "沒有房子 沒有孩子" 라는 말을 들었다. "방이 없어 아이가 없다". 아이를 키울 방이 없어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현지인 이 그런 얘기가 아니라고 했다..


a 튀기다(작 炸짜) 炸鷄(짜지/튀긴 닭)
b 볶다(초 炒 차오) 炒飯(차오판/볶은밥)
c수기(手機 소지) Hand-phone
d안휘성방(安徽省幇) 상하이幇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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