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밥벌이 중이었다.
그때 들려온 소식 하나.
“중국 업체가 한국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쇼룸을 제공하고,
디자인을 판매할 수 있도록 숙박비와 비행기 값을 지원해준다.”
몇몇 브랜드를 선별해 간다고 했지만, 기준은 알 수 없었다.
당시 우리는 간신히 브랜드를 이어가던 시점이었고,
그 이야기는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한국 패션을 좋아해서, 디자이너들을 지원하는 제도라 믿었다.
그곳에서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꽤 괜찮은 건물, 15평 남짓한 공간에 쇼룸을 세팅했다.
가구를 들이고, 홍보 차 패션쇼도 열었다.
주변 공장과 브랜드 업체를 방문했고, 방송 취재도 들어왔다.
그야말로 뭐라도 되는 줄 알았다.
저녁이면 함께 간 디자이너들과 중국 요리를 먹고, 도시를 구경했다.
샤오롱빠오 만두와 유자 과일은 유난히 맛있었다.
“공짜 여행”이라 생각하면 마음도 편했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씩 중국 출장을 다녀왔다.
쇼룸 세팅, 패션쇼, 업체 미팅으로 1년은 금세 흘러갔다.
한국에 돌아오면 어딘가 붕 떠 있었지만,
간간히 팝업이나 프로모션, 강의로 현실과의 균형을 맞추려 했다.
그 시절 우리의 수익 모델은 단순했다.
쇼룸에 옷을 걸어두고, 공장이나 브랜드와 협업을 하거나,
그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건당 30만 원 정도에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통역사가 있어도 실질적 비즈니스로 이어지지 않았다.
협업 계약은 모호했고,
비교할 만한 사례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었다.
언젠가 꽃길을 걸을 거라고…
1년 반쯤 지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호텔 숙소는 난방도 안 되는 기숙사로 바뀌었고,
비행기 값 지원도 절반으로 줄었다.
에이전시는 “중국 업체 예산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실적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출장은 한 달에 한 번에서 두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우리의 디자인이 중국 업체에서 이미 생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협업 생산이라 믿었지만,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유령 디자이너였다.
그 사실도 어쩌다 친해진 중국 공장 친구에게서 들었다.
게다가 견학 갔던 브랜드 회사에는 우리 디자인뿐 아니라
다른 한국 디자이너들의 제품도 그 회사 이름으로 둔갑해 있었다.
우리는 아예 판에서 제외된 채였다.
분노한 우리는 에이전시에 따졌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우리도 손해가 많아요.
그리고 한국인은 중국에서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곧 허탈함으로 바뀌었다.
애초부터 설계된 일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희망에 부풀어 스스로 속은 걸까?
우리는 쓰고 버리기 좋은 카드였을 뿐일까.
쇼룸에서 물건을 돌려받는 데조차 또 돈을 내야 했다.
집기들은 우리가 산 것이었지만, 되팔 기운조차 없었다.
중국 중고 플랫폼도 알지 못했다.
결국, 2년 넘게 운영했던 쇼룸을 정리하며
남은 건 허탈감뿐이었다.
“그냥 우리를 쓰기 좋은 젊은 디자이너로 본 걸까.”
“우리가 뭐라도 된 줄 알았던 건가.”
남은 건 단 하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하는 씁쓸한 자각이었다.
무언가의 간절함은 보기 좋은 먹이감이었을까?
그렇게 우리의 생존의 일상은 다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