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병의 추억은 사라지고, 생존의 짐더미만 남았다.
당시의 내 브랜드는 마치 ‘밑 빠진 독’ 같았다.
쏟아부은 것은 열정이었으나,
돌아온 것은 가난과 조울증뿐이었다.
경험도, 자본도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
적은 돈으로 비싸게 찍어낸 소량의 제품들은
매장에서 몇 개 팔리면 출고 시기를 놓치기 일쑤였다.
프리랜서를 하면서 브랜드를 돌봤지만,
결국 몸과 마음이 먼저 바닥을 드러냈다.
그렇게 나의 첫 도전은
‘잠정 휴업’이라는 이름으로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2년 넘게 의류 패턴사로 일하게 되었다.
사업 자금도 모으고, 내 옷의 패턴비라도 벌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내 브랜드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첫 번째는 공임이 비싼 핵심 제품의 생산 사고였다.
돈을 주고 일을 맡겨도 최종 책임자는 결국 나였다.
나의 미숙함은 그대로 돈과 시간으로 연결되었다.
두 번째는 일본 백화점 팝업스토어에서 돌아온 '역관세'.
일본 관세와 소비세, 다시 한국으로 들어올 때의 수입 관세와 부가세까지.
예상치 못한 세금은 치명적인 손해를 만들었다.
몇 달간 모아둔 돈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다시 생계를 위해 다시 패션회사 디자이너로 돌아갔다.
신설된 기획부서라 일의 방향이 명확하지 않았고,
이유 모를 야근이 이어졌다. 주말도, 휴일 반납해야 했다.
결국 허리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한 동안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름 구조조정 명단에 내 이름은 이미 올라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모아둔 돈은 또 사라졌다.
그 즈음 개인 브랜드를 하던
대학교 동기 오빠와 함께 공동 사무실을 얻게 되었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부족한 노하우,
무엇보다 월세를 나누고, 집기도 같이 쓰면 좋을 것 같았다.
집 앞 창고와 동대문 카페를 전전하던 시절에 비하면,
넓고 제대로 된 사무실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당시 대출도 두 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대출을 받아도 노하우가 없었다.
두 시즌 정도 생산하고 통장은 다시 비어갔다.
입점했던 편집숍들은 매출 부진으로 문을 닫았고,
어쩌다 잡힌 백화점 팝업 행사는
높은 수수료와 세금을 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생산보다 더 높은 벽은 ‘유통’이었다.
결국 우리는 생존을 위해 각자의 브랜드를 내려놓고
‘프로모션(제작 대행)’ 일을 받기 시작했다.
생산 사고만 없다면 초기 투자비가 들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외주 패턴을 받고 주말엔 판매 알바를 했다.
다시 브랜드를 하겠다고 얻은 사무실은,
어느새 월세와 대출금을 갚기 위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공동 사무실.
처음에는 탁자 위 꽃병에 꽃도 꽂아두었는데..
곧 짐이 한가득 쌓여 숨막히는 짐더미로 채워졌다.
그곳은 더 이상 ‘꿈을 꾸는 사무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선’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수없이 부딪혔다
사소한 성격 차이,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지독한 피로감.
상대가 미운 것인지, 무능한 나 자신이 미운 것인지,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미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우리가 너무나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 비좁고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 바로 나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생존을 이어갔고, 꿈에 목말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