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탈하지 못했다. 봉탈은 패션계 농담거리로, 패션계 탈출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시 현실의 길로 들어섰다.
프로모션 업무(제작 대행)를 꾸준히 이어갔고,
블로그를 통한 패션 교육도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대출을 모두 갚았다는 것이었다.
5년 동안의 상환 끝에 남은 건,
신용 1등급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브랜드 재고는 있었지만,
신상품은 거의 제작하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힘을 쏟은 탓인지,
열정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오빠는 가끔 프로모션 업무 중
남은 원단으로 새 옷을 만들곤 했다.
그렇게라도 브랜드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중, 우리는 패션창작스튜디오에 지원했다.
나는 떨어졌지만, 오빠의 브랜드는 붙었다.
같이 사무실을 쓰며 생존 업무를 해왔기에,
우리는 그 브랜드를 함께 하기로 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브랜드가 나아지면,
내 브랜드도 다시 해보자고 했다.
어쩌면 이 말은 아쉬움이자, 전환점이자,
미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도 차고 먹고 살기에도 벅찼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열망은 여전했지만,
리스크를 감당할 용기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저 생존하기 위해 일을 찾아다녀야 했고, 늘 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돌덩이를 매일 산에 올리는 시지프스의 삶 같았다.
일은 했지만, 무기력함은 쌓여갔다.
그리고 사소한 일로도 사무실에서 죽일 듯이 다퉜다.
왜 다퉜는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어쩌면 기억에서 지워버린 걸지도 모른다.
남은 건 그저 상처뿐이었다.
매번 뭔가 분하고,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세상을 산다는 게 원래 이런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광할한 우주속 그저 작은 점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게 무기력해지다가도,
다시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담담히 하루를 이어갔다.
그 무렵, 나는 야간 대학원을 준비했다.
늦었지만,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배운 게 이것뿐이라서, 나는 이 길 위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냥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나아질 거라며…”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조용히 하루를 또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