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길을 잃었다. 열정만큼 더 아팠을까?
집에서는 매일 같은 말이 들려왔다.
“4년제 졸업했으면 이제 취직해야지.”
하지만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원하는 회사도, 기준도 없었다.
내가 아는 세상은 학교와 아르바이트뿐이었다.
‘회사’라는 단어는 어쩐지 멀고 낯설었다.
그저 오늘 올라온 채용공고를 보고,
무작정 이력서를 쓰고 포트폴리오를 첨부했다.
디자이너 브랜드들, 연예인 쇼핑몰…
출근하라고 연락이 오면 일단 들어갔다.
그리고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사이
몸은 병이 나고 마음은 텅 비어갔다..
9시가 넘는 야근은 당연했고,
급여는 항상 제자리였다.
회사에선 디자이너 체면 차리라며
옷과 신발을 눈으로 체크했다.
하지만 급여에 맞춰 산 옷과 신발들은
언제나 눈치의 대상이 되었다.
분주하게 걸어 다니던 발은
저렴한 구두에 늘 아려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됐다.
패션 업계 사람들도 낯설었고,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게 되버렸다.
패션을 한다는 건, 결국 로망이었을까.
내가 부족한 걸까, 아니면 세상이 냉정한 걸까.
배움과 열정으로 이어오던 길이 이젠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2년쯤 흘렀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패션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며 국비지원 패션 MD 교육도 들었다.
새벽에는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판매 아르바이트,
낮에는 리폼 스타일리스트로 방송 촬영에 참여했다.
방송에 나가자 부모님은 즐거워 하셨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건 내 실력이 아니라, 단순한 브랜드 홍보일 뿐이었다.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수업의 반복처럼 느껴졌다.
그저 나라에서 하는.. 무료 교육일 뿐이였다.
그래도 “이것도 경험이겠지” 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
그러다 꿈에 그리던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학교 시절 책에서 보던 ‘뉴욕 패션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다.
패션스쿨이나 어학연수를 갈 형편은 안 됐지만,
부모님의 지원금과 내가 모아둔 알바비를 합쳐서,
3개월 여행비자로 다녀오게 되었다.
나에겐 왕복 비행기 표 한 장, 한인타운의 작은 방,
그리고 부모님이 싸주신 누룽지와 반찬뿐이었다.
영어는 서툴렀지만, 한인 일자리 사이트를 통해
맨해튼 7번가의 패션 생산업체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당시 뉴욕 패션위크 기간이라 브랜드 업체들은 분주했다.
거래처 중 하나가 ‘제이슨 우(Jason Wu)’였는데,
컬렉션 헬퍼를 해주면서, '제이슨 우' 쇼를 관람할 수 있었다.
그 현장의 공기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뉴욕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패션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에도 일부 참여할 수 있었다.
3개월짜리 여행 비자.
짧지만 강렬했던 뉴욕의 시간이었다.
볼품없던 나였지만 초라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게 나를 다시 살아 있게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짐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이든, 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큰 열정은 더 아프게 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