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좋은 핑계

비건 지향

by 지향

오늘은 2022년 10월 30일 일요일. 서울혁신파크에서 열리는 비건 페스티벌의 서포터즈로서 축제 시작 전 미리 가서 준비할 것이 많다. 전 날 만든 홍보물을 제 위치에 맞게 뜨개실로 걸어두거나 작은 공연이나 행사가 열릴 위치들과 셀러들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주말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아침 6시에 졸린 눈을 마구 비비며 일어나 전철에 탔다.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은 그냥 플렉시테리언이었다. 단체생활과 아직 내 입맛이 완벽하게 비건이 되지 못한 탓이다. 아니, 단체생활은 그냥 대기 좋은 핑계고 의지가 없었던 거지. 보통 스태프들끼리 함께 요리해먹는데 추석 때 떠난 회식이나 MT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육식을 즐겨놓고 갑자기 채식한다고 고기반찬을 안 먹으면 다른 스태프가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단체생활 때문에 비건 “지향”으로 산다고 하는 건 허울 좋은 핑계인 것이다. 처음부터 안 먹었으면 당당하게 “비건입니다.” 할 일이 오랜 시간 바뀌지 않은 편식나라 대마왕 입맛 탓에 단체생활을 나무라고 있다.


그래도 혼자 외출하는 날엔 채식으로 챙겨 먹고 싶었다. 그동안 숙소에서 나로 인해 희생된 동물이 계속 마음 한편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제주 비건 식당을 찾아두었다. 어느 날은 사장님이 사다 주신 계란의 크기가 무척 작았다. 어디선가 얼핏 들은 정보로는 양계장에서 수도 없이 인위적으로 수탉의 정자를 암탉에게 주입해 착취당하며 알을 낳는 탓에 알의 크기가 본래 크기보다 작아진다고 한다. 그 계란 한 판을 보고 있자니 바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내 자신을 한탄했고 미안했다. 속으로만 미안해하고 행동이 쉽게 바뀌지 않는 나라는 인간에게 애잔함을 표한다. 그래서 휴무인 날엔 의식적으로 비건 카페나 식당을 찾아다녔다.


톰톰카레
루루비건
마이리틀마운틴(팝업)
유주얼커피
감미롭다 제주



본가로 올라와서는 집에서 자주 해 먹으려고 한다. 제주에서 지내며 요리해 먹는 습관을 기른 덕에 바깥 음식을 사 먹기보단 내가 직접 요리하며 들어가는 재료와 향신료들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재밌어졌다. 단백질 섭취를 많이들 걱정하지만 우리에겐 양질의 콩으로 만들어진 두부가 있지 않나. 나는 잘 안 먹지만 아직 고기의 식감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겐 대체육이란 옵션도 있다. 사실 이것도 반대하는 여론이 있지만 노력하는 사람에겐 박수 쳐줄 수 있는 선택이다.


비건 페스티벌의 서포터즈 활동을 하며 사람들과 얘기해보니 비건이 주류가 되는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배울 점이 많다. 집에서도 바깥 인간관계에서도 논비건이 주류인 무리에 있다가 비건이 주류가 되는 곳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찬 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깼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NEW 주류사회다. 활동하며 먹은 짜장면은 고기가 없어도, 피자는 육류(가공품 포함)와 치즈 없이 먹어도 맛있었다. 누구 하나 “고기 없어?” 하며 실망하는 소리 내지 않고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하는 건강한 대화가 우리의 식사를 더 깊고 진하게 만들어줬다. 어쩌면 식사는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가 더 양질의 식사를 결정할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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