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힌남노

모든 걱정이 무색하게

by 지향

2022년 9월 5일 월요일 태풍 힌남노가 제주를 시작으로 육지의 동남부 지역을 덮쳤다. 태풍이 오기 일주일 전부터 육지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제주에 머무는 나를 한껏 걱정해주며 안부를 물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정작 제주에 지내는 나는 아무 생각이 없고 오히려 내가 지내는 숙소는 튼튼하여 괜찮다는 답만 반복했다. 상대가 걱정할까 봐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육지의 아파트보다 훨씬 튼튼한 숙소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내에서 재즈 음악이나 클래식 음악을 틀고 있으면 평화롭기 그지없을 정도로 유리창의 튼튼한 방음, 방풍 효과 덕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간과하고 오후 5시경 입이 심심하여 근처 편의점을 나서고 2분 뒤,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다시 돌아왔다. 숙소가 나무로 둘러싸인 골목길에 있어 괜찮았던 거지, 골목길 초입에 도착하자마자 사방에서 나를 때려대는 바람들 때문에 그곳에서 한 발 떼는 순간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이건 아니구나. 하하하' 생각하며 다소 건방졌던 나 자신을 자책하며 웃었다. 그렇게 태풍이 온 날은 우리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손님도 몇 분 없었고 우리가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거센 태풍이 휘몰아치는 밤도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하늘은 "간밤에 무슨 일 있었니?" 하는 얼굴로 우릴 맞이했다. 야속했다. 태풍이 오기 며칠 전부터 흐린 하늘, 꿉꿉한 날씨로 사람을 기운 빠지게 하고 심지어 태풍 전 날 구름들로 인해 밤엔 달님마저 안 보여 속상했는데 이렇게 쾌청한 하늘이라니... 야속했지만 나는 얼른 청소 업무를 마치고 푸르른 하늘을 보며 산책을 나섰다. 아직 바람은 셌지만 덕분에 제주에 오고 처음으로 상쾌하게 산책할 수 있었다.




도로와 동네 곳곳에는 아직 너저분한 나뭇잎들과 잔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불평하는 이 없었다. 힌남노가 오랜만에 깨끗한 제주 하늘을 보여주어서 그런지 그런 잔가지들쯤이야 하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내가 지내는 마을엔 큰 피해가 없었던 것 같다. 큰 나무들이 많아서 혹시 이 나무들이 쓰러지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산책을 하고 방에 와서는 샤워를 하고 점심식사를 해 먹고 쉬고 있던 중 오후 3시경 사장님의 오늘 손님이 없으니 쉬어도 좋다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이 무슨 행운이야! 이렇게 되면 스케줄상 내일 근무도 휴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 손님이 없으니 내일 할 일이 없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아마 태풍이 제주에 온다는 소식에 일주일 전부터 취소 문의가 많았던 덕(?)이다. 사장님의 속은 타들어 가겠지... 속으로 야호! 를 외치고 얼른 외출에 나섰다. 뚜벅이에겐 가혹한 제주의 교통편 탓에 멀리는 못 가니 서귀포시내의 카페로 향했다. 서귀포시내까지도 한 시간이 꼬박 걸리지만 그 마저도 행복했다. 불과 두 시간 전만 해도 이 하늘, 이 날씨에 못 나가는 내 신세를 한탄했는데 이렇게 나가서 여유로울 수 있다니 뜻밖의 행운이었다. 시내의 카페 <너븐>에 가는 길마저도 그림 같았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그 근처에는 암벽들과 내가 좋아하는 야자수들 그리고 초록잎이 무성한 키 큰 나무들. 카페에 도착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무화과와 고수잎, 레몬그라스가 들어간 차를 주문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을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스태프들과 읍내의 호프집에서 내일의 자유시간을 축하하는 맥주도 한 잔 했다. 스케줄 근무라 스태프 전원이 같이 저녁시간을 즐길 수 있는 날은 드문데 이렇게 이야기하고 떠들 수 있다니, 그 시간이 정말 소중했다. 읍내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 걸리지만 이미 그날의 마지막 버스는 운행 종료된 시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걸어오고 도착하자마자 단잠에 빠졌다.


다음날 9월 7일 수요일, 원래대로라면 조식 근무였지만 갑작스러운 휴무가 생겨 못 갈 뻔했던 비건 식당 <마이 리틀 마운틴>의 팝업에 다녀올 수 있었다. 서울에서 본 매장을 오픈하기 전, 제주가 고향인 자매 두 분이 2주간 팝업 식당을 선보인다고 하셨는데 스케줄 근무 탓에 못 갈까 봐 아쉬움을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갈 수 있다니, 제주에서 지낸 2개월 중 가장 행운인 날 아니었을까. 제주 햇감자 수프와 호두 크로칸트가 올려진 말차 마들렌으로 내 점심식사의 문을 열었다. 햇감자 수프는 내 입맛에 짠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함께 나온 식사용 빵을 뜯어 국밥처럼 말아먹으니 금상첨화였고 말차 마들렌은 교토에서 지낼 당시 흔하게 먹었던 우지 말차가 생각나는 맛이었다. 말차의 향과 맛이 정말 진했고 단 맛을 내려고 애쓰지 않은 맛이라 더 담백하고 맛있게 먹었다.

틈이 날 땐 혼자서라도 채식을 하려고 하는데 제주의 야채들은 정말이지 신선하여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기 좋다! 재료의 싱싱함을 느낄 수 있어서 오감이 깨고 어쩔 땐 기분 좋은 흙 향도 나는 것 같아 아침 이슬이 느껴진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는 바로 옆에 있는 오가닉 코튼 삭스 브랜드 <그린 블리스>의 쇼룸 구경 아니, 쇼핑을 했다. 양말을 좋아하는 나는 수많은 양말들을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이건 귀여우니까, 저건 색깔이 예쁘니까'라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 자신을 속이고는 결제했다. 지갑을 들고 다니면 안 되는 건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쇼룸 재방문을 다짐하고 맑은 하늘, 내리쬐는 햇살 그리고 녹음을 즐기려 또 산책에 나섰다.


힌남노가 남기고 간 건 지나가는 비행기마저 그림 같은 깨끗한 하늘, 갑작스렇지만 얼마든지 반가운 휴무, 비건 식당을 서울 사람들보다 먼저 방문해볼 수 있었던 행운정도 되려나. 아 정말 많다. 배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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