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시장을 가는 편이다. 대형마트에서 일주일 치나 혹은 열흘 치를 미리 장 봐놓고 조금씩 소비하는 습관과는 거리가 멀다. 파 한단이 떨어져도 바로바로 사다 먹기를 좋아하는 내게 집 주변의 상가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
게다가 의외의 오지랖도 있는 편이어서, 만약 마음에 드는 떡집이나 생선가게 등이 집 앞에 입점을 하면, 그 가게가 장사가 잘 되어 오래도록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늘 주인에게 ‘물건이 너무 좋다’, ‘맛있게 먹게 해 주어 감사하다’, ‘아무쪼록 오래도록 계셔 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치킨 한 박스라도 똑 떨어지게 먹은 날은 바로 치킨가게로 전화를 해 땡큐 인사를 남기는 올곧은 의지의 소유자다. 어찌 되었건 나름 주변의 지역상권에 꽤 많은 공을 들이는 셈이다.
그래서 무조건 집 근처에 가게가 많은 동네가 좋다. 운전할 필요 없이, 그저 간단하게 입은 채 뽀르르 뛰어나가 뭐든지 살 수 있는 동네를 제일로 치는 주거조건이다.
지금은 이사 왔지만, 십 년 전 살던 동네도 무척 편리했다. 집을 나서면 바로 약국이며 베이커리, 과일가게, 떡집, 친환경 슈퍼, 커피숍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때 매일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와 한 바퀴 돌면 거의 한 시간쯤 소요되었다. 좋아하는 가게들을 순례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주인의 성품에 따라 물건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성격이 까칠해도 운영하는 가게에 집중하는 주인들은 매력적이다. 손님에게만 친절하고, 막상 판매하는 물건에는 공을 안 들이는 대중적인 가게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모든 가게들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 당시 유독 좋았던 곳은 생선가게였다. 늘 신선한 생물들이 각 맞춰 진열되어 있었는데, 운영하는 사람은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계절이나 날씨와 상관없이 까만색 비니를 눌러쓰고 있었다. 은색의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안경이 생선가게에서는 좀 생뚱맞아 보였다. 언제나 별 말이 없고 무뚝뚝해 보여도, 물건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증명해 보이는 듯 늘 진열대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는 사실 가게 사장님들에게는 별 인기 없는 손님인 것이, 많이 사지는 않는 주제에 늘 주문은 까다롭기 때문이다. 어차피 식구가 적은 편이라 많이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생선가게 사장님은 단골들의 성향을 빨리 파악하는 편이었다. ‘고등어 주세요.’ 하면 ‘구울 거죠?’라고 대답하고 금방 십자로 토막을 내어 기가 막히게 삼삼한 소금 간을 해주곤 했다. 적게 사서 미안하다고 하면 씩 웃고 말았지만, 가끔 비싼 생선을 싸게 떼 왔다고 인심 좋게 할인해 주기도 했다. 오늘은 이건 사지 말아라, 그건 내일 사는 것이 좋다고 진심 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질 좋은 생선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금방 동네의 인기 가게로 소문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선가게 말고 내가 그 남자와 자주 부딪치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동네 은행 인출기 앞이었다. 남자는 매일매일 그날의 매상을 늦은 오후 비슷한 시간대에 인출기를 통해 입금시키는 것 같았다. 늘 다소 뿌듯한 표정이었고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늦가을이었다. 시내에 모임이 있어 정말 오랜만에 힐을 신었다. 십 년 전 나는 아주 한겨울이 아니면 양말 따위는 신지 않는 팔팔한 청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고, 피곤했고, 감기 기운이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관자를 넣은 따끈한 미역국이 생각났다. 그래서 조개를 사러 생선가게에 들렀는데, 주문을 하려니 잔기침이 나왔다. 남자는 그날도 비니를 쓰고 있었고, 예의 무뚝뚝한 매너로 관자를 담아 주었다. 그러고는 돌아서는 내게 예상치도 못했던 말을 불쑥 던졌다.
“이 추운 날에 맨발로 구두를 신고 다녀요? 다음부터는 양말 꼭 신고, 아프지 맙시다.”
‘어머나..... 이 남자가 손님에게 이런 말도 할 줄 아나?’ 하는 심쿵한 마음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가 다시 보였고, 약간 부끄러워졌다. 저녁으로 미역국을 먹으면서 계속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생선가게에서 듣기에는 지나치게 로맨틱하였다.
생선가게 사장이지만 그는 생선 냄새는 아주 질색하는 남자이다. 퇴근 후 몸에 밴 비린내에 치를 떨고, 매일 두 번의 샤워를 하고 잠든다. 아내는 매우 미인이다. 의외의 고급스러운 취미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어울린다. 클래식을 들으려나..... 가게가 쉬는 날이면 비니는 벗어던지지만 아주 날렵하게 옷을 입고, 고급스러운 향수를 몇 방울 뿌린다. 태어난 고향은 바닷가이고, 전직은 중소기업의 기획실이다. 바른말하는 성격에 상사와 부딪치고, 회사를 때려치운다. 그리고 알던 후배의 소개로 생선가게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적성에 맞아 신나게 일하는 중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며, 그를 추측하는 내가 주책스러워 참 속도 없다 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째 그다음부터는 생선가게 갈 때 이상하게 어색했다. 그리고 뭔가 조금 부담스러워져서, 더 아무 말이나 할 수 없게 되었고, 가기 전에 꼭 먼저 내 신발을 살펴보는 의식적인 행동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육 개월쯤 지났는데, 어느 날 은행 인출기 앞에서 남자와 딱 마주쳤다. 평소와 다름없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서는 내게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저 이제 가게를 옮겨요. 여기서 잘된 덕에 좀 더 확장해서 갑니다. 그동안 반가웠고, 옷은 좀 실하게 입고 다녀요.”
남자는 망설이지도 주저하지도 않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엄청 쑥스러웠는데,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뭔가 덕담을 하고 돌아섰다. 나오면서 생각하니 꽤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물 좋은 생선가게는 물 건너갔다. 그리고 날이 추우면 지금부터는 양말을 신는 것이 좋을까?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 까만 비니의 생선가게 사장님은 우리 동네에서 사라졌다. 아직도 비니를 보면 생선가게가 생선가게를 보면 비니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