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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Sep 15. 2020

초록색 태양

손바닥소설






나는 초록색 태양으로 불린다. 이 특이한 이름이 그가 나를 선택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어둡고 추웠던 겨울, 길가 한적한 서점 책꽂이에 처박힌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를 기다림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일주일 전과 같은 오늘, 한 달 전과 같은 오늘, 일 년 전과 같은 오늘...  시간은 나를 버리고 잘도 흘러갔다. 그저 책꽂이와 책꽂이 사이에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 빛바랜 벽지와 같이 나도 서서히 빛바래고 있었다. 서점을 찾는 어느 누구도 나의 이 특이한 이름에 관심 두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내가 존재한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동화책 제목이 정말 특이하네요. 혹시 재미있나요?” 

그가 나를 꺼내 망설이는 듯 서점 주인에게 물었을 때 나는 혹시 무감각한 서점 주인이 초를 칠까 봐 오금이 저렸다.

“글쎄요. 제가 읽어보질 않아서... 요새 잘 나가는 건 이쪽에 있는데요.”


하지만 서점 주인의 그 말이 오히려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전등불들의 이야기, 어린양의 늑대, 길에서 만난 꼬마 같은 내 목차를 확인하자마자 나를 그의 딸에게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만났다. 그는 잘 구워진 군밤 몇 알과 함께 딸의 조막손에 나를 쥐어 주었다. 

“아빠 이거 읽어줘.” 

“알았어, 나중에 읽어줄게.”


그때 그의 딸은 고작 네 살이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나중에 읽어주겠다던 그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대신 브라운색의 딱딱한 겉표지, 까만 기차와 나무가 그려진 개성 있던 나는 그녀의 놀이 감이 되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침을 묻히고 놀다가 펜을 쥐게 되면서부터 의미 없는 낙서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래서 초록색 태양이었구나... 별건 아니네’

마침내 그녀가 익숙하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나는 그녀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별거 아니라고 툴툴거렸지만 거듭해서 나를 소유했다. 나는 매번 그녀의 일부가 되었고, 가끔은 하나가 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나의 이야기로 그녀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자라났다. 더 이상 그녀의 놀이 감도 꿈도 될 수 없었다. 나는 버려지지는 않았지만 잊혔다. 

세월이 흐르자 사는 곳이 달라졌다. 다섯 번, 열 번 거듭 이사를 하면서 낯선 책꽂이에 꽂혀있었고 때로는 몇 년을 어두운 박스 안에 갇혀 있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단 한 번이었지만 나는 선택받았고 충분히 사랑받았다고 느꼈다. 그 정도면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직 버려지지 않았다. 


이제 나의 내부는 갈색 빛으로 변색되었고 습기 하나 없이 메말랐다.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도 희미한 몇몇의 장면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희망도 내일도 다 놓아버렸는데, 갑자기 왈칵 누군가가 나를 움켜쥔다. 

움직임이 강렬한 파동을 선사한다.

“엄마, 초록색 태양, 이거 엄마 동화책이었어? 제목이 희한하네. 나 읽어봐도 되지?”

"어머, 너무 오래돼서 바스라 지겠네. 조심해서 살살 읽어봐. 엄마가 아끼는 책이야. “

나를 향한 그녀의 말이다.

‘바스러지면 어때, 니가 나를 떠나면서 나는 이미 끝났는데...'

어차피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는 걸까? 

나는 1968년생 특이한 이름의 초록색 태양이고,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다시 한번 생동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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