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소설
오늘도 개수대에는 작은 컵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전기밥통의 보온시간을 나타내는 숫자도 68을 넘어서고 있다. 수십 년 밥을 지어온 늙은 여자의 주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기력한 장면이다. 창가 일인용 소파에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듯 앉아있는 그녀가 보인다. 졸음이 몰려오는지 들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에 밀어놓고, 돋보기를 벗으려던 찰나 휴대폰의 알림음이 울린다. 딸의 톡이다.
‘엄마, 오늘 선이 좀 받아줘. 지금 회의 중인데.... 미쳤나 봐. 오후까지 연장이래. 선이 친구 두 명 같이 간식 먹이고 미술 보내야 되는 날이야. 알지? 엄마 오늘 스케줄 없다고 했으니까... 부탁해. 늦으면 안 돼!‘
다급한 메시지를 보니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다. 시간을 확인하자 서둘러 일어선 그녀는 어제 입었던 카키색 면티를 목으로 끼워 넣다 힘겹게 도로 뺀다. 옷에서 뭔가 좋지 않은 냄새를 맡은 듯 코를 씰룩 인다. 잠시 멈춰 섰던 그녀가 커튼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을 보자 방으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연다.
같은 초록 계통이지만 섬세해 보이는 민트색 린넨 니트를 꺼내 빠르게 몸에 걸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해 놓인 시계를 향한다. 정신없이 뛰쳐나가는 그녀의 등, 린넨사의 까슬까슬한 빈틈 사이로 가을빛이 스며든다.
딸아이 아파트 앞에 도착하니 유치원 하원 버스 도착 사분 전이다. 정각에 버스가 멈춰 서고, 차돌같이 맨질맨질한 선이 그녀를 향해 “할머니...”하고 달려든다. 선의 뒤로 여자아이 하나 남자아이 하나가 줄 서듯 나란히 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할머니 배고파. 피자...”
급식으로는 어림없었을 아이들을 태우고 피자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녀의 입속에도 침이 고인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는 했지만 먹는 양이 형편없다. 대신 오전 내내 빈속이었던 그녀가 더 게걸스레 피자를 욱여넣는다. 오랜만에 먹는 피자 맛이 오늘따라 정말 달다고 느낀다.
손에 피자 한쪽씩을 들고 아이들은 곧 가야 할 미술학원 선생님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 어린 나이에도 벌써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의무감을 느끼는 아이들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다 선과 아이들이 왁자지껄한 옆 테이블에 시선을 빼앗긴다. 고깔모자를 쓴 서너 명의 또래들이 케이크를 앞에 두고 이제 막 촛불을 끄려 하고 있다. 부러운 마음에 허전한 얼굴을 한 아이들에게 그녀가 은근히 묻는다.
“우리도 고깔모자 쓸까? 꼭 생일이 아니어도 생일파티는 할 수 있어.”
그 소리를 듣자 아이들이 ‘꺄악’ 소리를 지른다.
반쯤 남은 케이크 상자를 든 그녀와 아직 고깔모자를 벗지 않은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풍선을 들고 차에 오른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들은 아직 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다. 이제 가기 싫은 미술학원에 가야 할 시간이지만 아이들의 얼굴에는 까짓 거 하는 여유로움이 배어있다. 식당에서 미술학원까지의 이동거리는 고작 십분, 흥이 남은 아이들이 노래를 한다. 노래에 맞춰 그녀의 차도 들썩인다.
미술학원을 코앞에 두고 그녀의 차가 멈춘다. 서둘러 일을 끝낸 딸이 미술학원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딸은 그녀를 보자 왜 이제야 오냐고 불만을 터트릴 기세이다. 차 문이 열리고 엄마를 발견한 선이 급하게 내려선다. 그 바람에 선의 손에 들린 풍선이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바람을 타고 두둥실.... 풍선 끝에 매달려 깃발처럼 펄럭이는 생일 축하 리본이 민망해 보인다.
순간 딸의 표정이 묘하게 복잡해지면서 그녀를 향해 소리 없는 무수한 말들을 쏟아낸다. 아차 하는 미안함이 섞여있다. 질 좋은 민트색 니트는 그녀가 생일이면 꺼내 입기 좋아하는 옷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딸을 향해 걸어오는 그녀의 얼굴은 무심함과 태연함이 있을 뿐이다. 오늘 하루는 한껏 배가 불러 부러울 것이 없는 좋은 날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