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소설
작은 거리, 이른 아침, 겨울, 아직 정확히 어떤 날씨 일지 알 수 없는 어둡고 뿌연 시야 그리고 거리의 중간쯤 위치한 역시 자그마한 건물 이층 창에 불이 켜진다. 이쪽 시작에서 저쪽 끝까지 거리의 건물 중 불 켜진 창은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금방 찰칵하고 밝아진 하나의 공간, 그 안은 정확하진 않지만, 어렴풋한 시야를 제공한다.
천천히 움직이는 누군가의 모습, 실루엣이 창가로 다가왔다 멀어지고, 멀어졌다 다시 다가온다. 등이 굽은 자세, 뭉개진 그림자, 몇 번의 느린 움직임 끝에 그 누군가는 창가에 고정된다. 동작이 멈추자 확인되는 크기는 자그마하다. 창가에 자리 잡는다. 그 후로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는다.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음악소리,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진다. 거리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 거리를 말하자면 길이는 짧지만 아주 짧지는 않고, 한적하지만 너무 한적하지 않은 적당한 분주함으로 설명된다. 드물지 않게 자동차가 오가고, 마을버스도 드나드는 대로변의 이면도로쯤인데, 느낌은 나름의 단정함과 온기가 배어 있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비슷한 거리를 찾으려면 아마 넓은 서울 시내에서도 후보지는 분명히 다섯 손가락 이내일 것이다. 거리를 뺑 둘러싸고 학교, 은행, 슈퍼, 빵집, 식당, 오피스 건물, 카페들이 제 역할에 걸맞게 들어서 있다. 행인들 중 이방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늘 거리에는 그곳이 익숙한 사람들만 오고 간다. 일상의 사람들이 보통의 속도로 거리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첫 번째 불빛인 그녀의 방은 회색빛 외벽을 가진 3층 건물의 이층이다. 일층에는 우동가게, 편의점, 단골만 찾는 꽃집이 영업 중이고 2층의 반은 한의원이 들어서 있다. 원래 운영 중이었던 미술학원이 없어진 후 몇 달간 공실이었던 이층의 반쪽 공간에 그녀가 들어왔다. 세 달쯤 전의 일이고, 한 블록 떨어진 아파트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제 팔십 중반으로 보이는 노년기의 여자, 그녀가 이곳의 주인이다. 주거공간이 아니어서 한 달 넘어 꼼꼼한 공사기간을 거친 후 이주했는데, 아무도 이곳이나 그녀에게 관심 두지 않는다. 다만 미술학원의 간판이 사라졌을 뿐이고, 눈썰미 있는 사람 몇몇이 이곳의 창이 유난히 깨끗해졌다는 정도만 느낄 뿐 변화는 숨어있다. 그리고 이른 아침 이곳의 창이 가장 먼저 환해지다가 가장 늦게 어두워진다. 무슨 이유인지 그녀는 이상한 곳에 노년의 거처를 마련한 셈이다. 탁 트인 전원도 훌륭한 휴양시설도 아닌, 단지 하루 종일 거리를 지켜볼 수 있는 창가의 풍경을 그녀는 과감히 선택했다.
슬그머니 거리로 스며들어온 것이다. 허술했던 예전과 달리 공들여 고친 실내는 의외로 아늑하다. 짙은 빛깔의 마룻바닥, 칸막이로 간략하게 구분된 작은 침실, 한 줄 싱크가 들어서 있는 간이주방, 오랜 세월 길들여진 3인용 소파, 키 낮은 책꽂이, 이처럼 별다를 것 없는 간소한 거실의 끝자락에 딱 보아도 무거워 보이는 긴 책상이 놓여 있다. 바로 창가 아래이다. 책상 앞에는 허리가 고정되는 딱딱한 의자 하나, 그녀의 자리가 보인다. 책상은 얼핏 보아도 공간의 주인공인 셈인데, 필요해 보이는 모든 것이 그 위에 자리하고 있다.
가벼운 돋보기와 수시로 끼고 벗는 목장갑, 마스크, 니트 모자, 보수적인 신문, 약봉지, 최신인 듯 보이는 노트북, 늘 사용하는 푸른색의 컵까지 익숙하게 자리 잡은 물건들은 그녀의 사용을 기다린다.
그 의자에 앉아 밥을 먹고, 신문을 보고, 차를 마시고, 전화를 하는 그녀는 나머지 시간 거리를 구경한다. 그녀는 그렇게 거리를 바라보지만 거리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 찾아오는 손님은 이제껏 두어 명, 걸려오는 전화는 하루에 한두 차례, 전형적인 노년의 시간이다. 고적하게 느리게 흘러간다. 그리고 점심 나절 한차례의 외출은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일상이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거리의 시작에서 끝까지 느린 걸음으로 사람들 무리에 섞인다. 빠르게 걷는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한쪽으로 비켜서서.....
정해놓은 몇 군데 식당 중, 한 곳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까지 거리의 모든 사람들과 마음속으로 인사한다. 이미 그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다. 늘 근심 어린 표정이 걱정되는 길 건너 병원의 간호사와 씩씩한 편의점 주인, 거리 끝 약국의 예민한 약사, 하루 종일 심심한 대형건물의 수위 아저씨까지 그들 모두는 그녀를 모르지만, 그녀는 그들과 소통한다. 오늘도 안녕한지 궁금해하고 내일은 더 나은 하루가 되기를 기원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돌아가며 먹지만 기운이 없을 때, 그녀의 선택은 부드러운 함박스테이크다. 거리 초입의 인기 식당인 그곳을 찾을 때는 항상 젊은이들의 식사가 끝나고 난 뒤의 한가한 시간이다. 한입 두입 천천히 맛있게 고기를 넘긴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고기는 오늘의 소중한 영양분이다. 그리고 식당 앞으로 자전거를 타거나 혹은 걸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소년들을 볼 때 그녀의 눈에도 파릇한 생기가 돋아난다. 에너지를 거리에 뿌려대는 소년들, 그 씩씩함과 두려움 없음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렇게 단조롭고 짧은 외출이 끝나면, 그녀는 다시 소중한 창이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하루가 다르게 작아지고, 느려지는 그녀에게 거리를 향한 창은 하나 남은 출구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인생이 더 이상 흐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녀의 시간은 언젠가부터 멈추어 섰다. 그래서 그녀는 흐르는 거리를 구경한다. 마지막이 될 때까지 창을 통해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