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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Oct 05. 2020

쇼핑의 원칙

20세기 플렉스

                                  


쇼핑처럼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행동양식이 있을까? 

물건을 구입하는 일 자체를 싫어하는 쇼핑 혐오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지고야 마는 쇼핑 중독에 이르기까지...  살면서 물건을 고르고 사는 일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기본적인 일상 중 하나지만, 성향에 따라 그 패턴은 천차만별이다.


나의 경우 쇼핑은 하나의 탐구와 같아서 경제적 여건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즐거운 놀이가 된다. 

내게 꼭 맞는 취향을 찾아 나서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시간이다.

작은 주방용품에서 침구, 화장품, 니트 한 벌에 이르기까지 품목을 가리지 않고 품질과 가격의 확고한 데드라인을 설정해 놓고, 내가 원하는 근사치를 맞춰나간다. 그러노라면 허비되는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새것을 시도하는 것에 소심한 내게 쇼핑은 신문물로 가득한 세상 구경이기도 한 셈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생기면 꼼꼼하게 메모한 뒤 인터넷으로 트렌드를 진지하게 조사한다. 넓혀져 있던 카테고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면, 그다음은 직접 눈으로 그 물건을 보기 위해 오프라인 매장으로 향하는데, 매의 시선으로 품질이며 가격 등을 세세하게 살펴본다. 


때로는 저렴한 가격에 내가 원하는 이상의 품질을 보유한 보석 같은 아이를 찾아내는 횡재를 할 때도 있지만, 지난한 노력이 헛된 시간으로 끝나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쨌든 그 사이 나는 열정 가득한 탐험가의 시간을 맛볼 수 있다. 

좋은 것을 비싼 가격에 구입하는 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 가격은 그 가치에 따라 내가 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야 쪼는 맛이 있다. 

쇼핑에 어처구니없이 탐험가 정신을 대입하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지만, 어찌 되었건 무조건 첫 가게에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용감무쌍한 결정의 고수들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직도 청계천에는 오디오 상가들이 모여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모두 용산으로 옮겨갔다는 소리를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십 대 끝자락, 나는 무려 서너 달치의 월급을 찾아들고 호기롭게 오디오 구입에 나선 적이 있었다. 꼭 제대로 된 오디오를 갖고 싶었던 것은 호사가 취향에 대한 동경이었다. 

20세기식 일종의 플렉스였다.

사실 음악을 전문적으로 듣는 편도 아니었고, 들어봤자 대중적인 가요 등속이 전부여서 개발에 편자인 셈이었지만, 그저 그런 컴포넌트를 나의 첫 오디오로 구입하는 것이 싫었다.     


몇 주 전부터 수도 없이 청계천 오디오 상가를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드나든 덕분에 무지했던 오디오에 관한 기초 상식들은 어느 정도 주워들은 시점이었다. 내 수준의 왕초보자들에게는 어떤 수준의 오디오가 적당한지 가이드라인은 숙지되었다.     


그날은 결전의 날이었다. 이제는 결론을 내려야 했고, 대충의 예산도 마련되었다. 아침 열 시쯤 청계천에 도착했는데, 점심도 쫄쫄 굶고, 여섯 시가 될 때까지 그야말로 한 가게도 빠짐없이 집요하게 원하는 오디오를 구입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거의 백여 개에 가까운 점포들이 빼곡한 오디오 거리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원하는 사양과 가격은 좀체 맞춰지지 않았다. 막상 사려하니 생각했던 예산에서 초과되었고, 가게의 전문가들은 저마다 다른 말을 조언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해도 져가고, 배도 고프고, 뺨은 달아 오른 채, 너무 많이 지친 나는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가 입구 쪽 가게의 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의자에 앉혀 음료수를 권하면서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보아하니 정말 무지한 초보인 거 같은데 아침부터 끈질기게 돌아다니는 것이 참 안쓰러워 보인다며 혀를 끌끌 찼다. 


어찌 되었건 나는 그곳에서 마침내 나의 첫 오디오를 구입했다. 시원스럽게 가격을 깎아 주는 마음 약한 사장님을 만난 것이다. 덕분에 내가 원했던 사양보다 업그레이드된 오디오를 품에 안았다. 모양이 깜찍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이름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그 오디오는 그곳에서 마치 나만을 기다려 온 것 같았다. 그건 바로 느낄 수 있었고, 그 후로도 오랜 시간 내 곁에 머물렀다. 

물론 두 번 다시 그런 전문적인 오디오 쇼핑을 하지는 않았다. 욕구가 충족되었으므로 시선은 다른 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아마도 남자들이 첫 자동차를 구매할 때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쇼핑은 나에게 있어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오랜 탐험 끝에 마침내 나의 취향을 발견했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드디어 너를 만났구나. 아끼고 사랑할 테니 우리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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