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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Oct 10. 2020

서류가방




십분 째 홀린 듯 한자리에 멈춰 서서 쇼 윈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예뻤다. 아무리 봐도 매장 전면에 디스플레이된 여성용 서류가방은 너무 깜찍했다.

30여 년 전이었고 이대 앞 수제구두 매장 앞이었다. 무심코 길을 가다 그 가방이 눈에 들어왔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장 안으로 들어가 가격을 물어봤더니, 백수인 내가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무늬만 대학원생이었고 마지못해 학적만 걸어 놓고 있었다.


물론 되고 싶은 것이 있기는 했다. 카피라이터가 로망이었는데, 문턱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뽑는 인원도 적었고, 무엇보다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직업이어서 경쟁률도 어마어마했다. 사실 그날 오전, 나는 모 광고대행사 공채 모집에 지원서류를 접수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그 서류가방을 본 것이다. 


가격만 물어보고는 아쉽게 매장을 나서면서, 나는 사장님에게 가방이 내 것이 될 것 같으니 팔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 실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세련미 넘치는 여사장은 가방이 매장에 진열된 하나뿐이라서 곧 팔릴 거 같다며 안쓰러운 미소를 날려주었다.


카피라이터가 되어 꼭 그 서류가방을 들고 출근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열병처럼 가방이 아른거려 카피라이터가 먼저인지 가방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열흘쯤 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지원서류가 통과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얼떨떨한 채 필기시험을 보러 간 건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시험은 떨어질 것이 분명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래서 차라리 필기시험의 마지막 과목인 카피 실기에는 배짱이 두둑해졌다. 어차피 떨어질 거라 마음대로 시원하게 카피 문안을 써 내려갔다. 시험지를 제일 먼저 제출하고, 시험장을 나서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그 길로 이대 앞 매장으로 갔다. 가방은 아직 팔리지 않은 채 진열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여자들 마다 그 가방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복잡한 거리에서 맥을 놓고 서 있자니 가방도 카피라이터도 저절로 포기되었다. 첫 지원이었는데 다시 시도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갖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다섯 살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일주일 후 필기시험에서 통과되었다는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았다. 그때 먼저 떠오른 생각은 가방이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그 독특한 브라운색 가방의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욕심이 슬그머니 일었다. 

며칠 후 면접시험 날 나는 최고로 긴장했다. 늦지 않게 도착했는데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다들 너무 똑똑해 보여 기가 죽었다. 시험관은 이제 서류나 필기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면접점수가 당락을 결정할 거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합격이 되어 그 가방을 들고 회사에 출근하는 나를 상상했다. 상상하려고 일부러 애쓴 것이 아닌데 자꾸 그런 모습이 떠올랐다. 대기번호가 거의 맨 끝이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제 서너 사람만 지나면 내 차례였다. 


초조하게 서성이는데 누가 뒤에서 내 등을 쳤다. 뒤돌아보니 중학교 때 과외 친구였다. 같은 학교도 아니고 그저 한두 달쯤 함께 공부한 사이여서 몰라볼 뻔도 했을 텐데 반갑게 아는 체를 해왔다. 그룹공채로 여섯 달 전에 입사해 근무 중이라고 했고 신입사원 티가 팍팍 났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와락 한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면접 때 어떤 질문을 받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내게 너무 긴장하지 말라면서 육 개월 전 자신이 받았던 면접시험의 질문을 말해 주었다. 나는 질문의 답을 생각해 보았다. 물론 같은 질문을 받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나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는 예상답안을 생각한 셈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면접원들 앞에 섰을 때 오래 기다린 탓인지 오히려 담담했다. 면접원 중 하나는 내가 서류나 필기는 미달에 가까웠지만 실기점수가 높아 최종면접까지 왔노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곧이어 질문이 던져졌다. 


그런데, 이럴 수도 있는 걸까?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질문은 아까 친구가 일러준 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생각했던 답안에 순발력까지 더해, 하나도 떨지 않고 똑 떨어지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밝아지는 면접원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살다 보니 이런 거짓말 같은 일도 일어나는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최종 결과는 또다시 열흘을 기다려야 했다. 기대한 대로 합격이었다. 

나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이대 앞 구두매장으로 달려갔다. 마치 가방이 내게 계속 시그널을 보내는 것 같았다. 하나뿐이라 금방 팔릴 것 같다던 가방은 그때까지도 얌전히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과 나는 이미 어떤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며칠 후 나는 상상 속의 주인공처럼 그 가방을 들고 첫 출근을 했다. 

꿈이 실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의 단비처럼 짜릿한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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