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위해 말해야 하는 이유/ 말해야 낫는 병
남편의 은퇴시기가 앞당겨졌다. 지난해 회사에서 남편이 맡아하던 사업이 정리되면서 남편의 거취 문제로 마음을 졸였다. 먹고사는데 지장이야 있겠냐며 불안해하지 말라는 위로는 귓등에 들리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과 상관없이 가족의 생계와 관련된 남편의 직장 문제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단 걸 깨달았다. 먹고사는 일이 편안하게 해결될 때는 먹고사는 일이 뭐 대수야? 생각됐다. ' 밥 세끼 먹고살면 되지 뭐 큰돈 들지 않고.' 친정아버지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 먹고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는지 너희들 세대는 잘 모른다. 세상 살기가 그렇게 만만한 줄 아는데 말이야. 먹을 거 다 먹고 잘 거 다 자고 돈 벌길 바라면 안 된다 " 그 말을 잔소리쯤으로 흘려듣다가 막상 먹고사는 문제가 발등에 떨어지면 체감되는 정도가 달라진다.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위중하고 중요한 일인지. 그깟 밥 세끼가 우주의 생명을 담은 밥 세끼로 우러러 보이고 부모님이 살아왔던 고단한 삶의 전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소설가 박애란은 책에서 '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라고 쓰고 있다. 내 삶에도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들길 원하면서 살아왔다. 남편이 직장 생활을 잘할 때는 그깟 밥 세끼가, 직장을 잃었을 때는 그깟 사치, 허영, 아름다움이 다 무슨 소용으로 전락한다. 1년 여 동안 남편 목숨은 하루에도 몇 번씩 붙었다 떨어졌다 널뛰다가 27년 직장 생활을 마무리했다. 자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독립을 했다. 가장이 직장을 나와 자기 사업을 시작하기란 심청이가 치마를 뒤집어쓰고 죽을 용기와 맞서는 선택임을 절감했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하기 전 한 달여 기간 동안 시간이 남아 드디어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게 됐다. 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가장이 10박 11일여 기간 여행은 회사를 그만둔 후에나 가능하다. 직장에서 잘려서 다음 직장으로 갈아타는 짧은 휴가든지, 자의 반 타의 반 잘리기 일보 직전에 스스로 사표를 던지고 자기 사업으로 갈아탔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유렵 여행을 가면 유심칩을 사서 끼우게 되는데 얇고 가늘게 생긴 Y자형 침이 필요하다. 핸드폰 옆에 작은 구멍을 침으로 눌러 유심칩을 빼내는 도구이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핸드폰을 사용하려면 내 정보가 담긴 유심칩으로 다시 갈아 끼워야 한다. 전화 통화를 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뭐 집에 가서 할 수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하던 차에, 지나가는 여승무원에게 혹시 유심칩 갈아 끼울 때 쓰는 Y자형 침이 있는지 물어봤다. 승무원은 따로 준비된 게 없다면서 미안해한다. 꼭 기대하고 물어본 게 아니어서 그러고 나서 잊어버렸다. 여러 날 돌아다니느라 피곤한 탓인지 확실히 돌아오는 비행기는 시간이 훌쩍 빨리 지나간다. 옆자리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오래 살고 있다는 한국인 여자분이 앉아서 둘이 현지 생활에 관한 이야기 나누고 오느라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내릴 때가 됐는지 승무원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분주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 여승무원이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 이거 승무원들이 사용하는 머리 실핀이에요. 유심칩 갈아 끼울 때 쓰는 Y자형 침이 있냐고 물어보셨죠?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실핀이 도움이 될까 해서요" 하고 건넨다. 말하고 나서 잊고 있었는데 기억했다가 챙겨주는 승무원이 너무 고마웠다.
그때 받았던 실핀은 다음 여행에 요긴하게 쓸 요량으로 책상 서랍 작은 케이스에 보관 중이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걸 요청해서 도움을 받게 되면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요청에 흔쾌히 답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밑져야 본전이다. 말했다 거절하거나 무반응이면 " 아니면 말고 " 하고 털면 된다.
뭐든 급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부탁을 해볼 수 있다. 마음속 든든하게 " 아님 말고 "를 장전하고 말해본다. 너무 조심스러워하면서 말하면 성공 확률이 오히려 낮다. 내 요청을 꼭 들어줘야 한다는 기대가 있으면 상대가 부담스럽다. 조심스럽게 말할 때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상대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나를 거절한 걸로 받아들일 때 긴장이 생길 수 있다. 말할 때는 상대가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그의 선택이고 그냥 가볍게 말할 수 있다면 훨씬 말한 대로 받아들여줄 가능성이 높아진다, 말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경험이 늘어난다면 혼자 애쓰며 산다는 외로움이 줄어들 것 같다. 말해보자 " 아님 말고 " 될지 안될지는 말해봐야 안다. 이런 말이 있다. 할지 말지 고민이라면 하는 게 낫다. 하고 후회하는 게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 해보고 실패한 경험이 살아가는데 큰 배움으로 남을 테니. 요즘은 말하지 힘들 때 카톡을 이용한다.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마음을 담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을 적는다. 막상 톡을 보내려면 다시 망설여진다. 그럴 때 눈을 감고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 뭔지 머물러 본다. 내 마음을 전하고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 마음에 머물러 본다. 그러고 나서 결과는 나를 떠난 일이라 믿고 진심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톡을 보낸다. 상대가 오해해서 나와 멀어진다면 그것 또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 수용할 마음으로 보내고 당분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