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처방전/ 가족 중 가장 안전하게 화를 쏟아낼 상대가 희생양이 된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일이다. 바쁘게 퇴근해서 두 아이 데리고 운전하는데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로 머리가 복잡했다. 운전을 멍하게 하고 가는데 뒤에서 투덕투덕 장난
을 친다. 조용히 해달라고 운전 중이라 침착하게 얘기했다.
5분 조용한가 싶더니 이젠 발을 들어 서로 차고 치고 동생 우는 소리가 난다. 미간에
힘이 빡 들어간 상태에서 조용히 하랬지! 언성이 높아진다. 그러더니 큰 아이가 배고프다
고 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 그렇지 엄마도 배고파 이 길만 지나면 모임에 가서 저녁 먹
자" 했는데 슈퍼가 지나가자 다시 그럼 초코파이라도 사줘 "한다.
" 조금만 기다리랬지? 금방 간다니까 "
큰 아이는 지금 당장 배고프니까 초코파이 사달라는 소릴 한 번 더 하는 순간 마치
차멀미 참다가 속이 확 뒤집히면서 토해져 나오듯 미친 듯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 시끄러~~ 너 지금 엄마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응!
“ 엄마 지금 운전하는 거 안 보여? 지금 가고 있잖아,”
“금방 도착해서 모임 가면 저녁 먹을 수 있다 했어? 안 했어? "
가족 중에 가장 약하고 만만한 자녀에게
감정을 쏟아붓게 된다.
아마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녹음해 두었다면 끔찍할 거다. 소리 지르는 내가 다 깜짝 놀란
는데 큰 아이 마음을 어땠을까 생각하면 부끄럽다.
가족 중 나의 감정 하수구 역할을 했던 건 큰 아이였다. 워낙 유순한 성격에 남을 배려하는 성향
을 가진 큰 아이는 나에게 가장 만만한 화풀이 대상이었던 것 같다.
뭐든 잘 이해해 쏟아부어도 제일 뒷 탈이 없었던 녀석은 상당히 클 때까지 내 화의
감정 하수구 역할을 했다. 물론 뒤에 그 대가를 호되게 치렀지만 말이다.
내가 부모교육을 공부한 계기가 큰 아이 때문이었다.
사춘기 접어들면서부터 눈에 띄게 공격적인 행동과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큰 아이의 공격성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했는지 하나씩 떠올랐다.
큰 아이가 6-7살 때, 자주 심하게 화를 내서
침대에 누워서 혼자 울다 저녁밥도 먹지 않고 잔 적이 많았다.
엄마에게 억울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삭히는 아이였다.
대개 가정에서 보면 힘 있는 남편은 아내에게 감정을 쏟아붓고, 남편에게 받은 스트레스
를 아내는 자녀들에게 쏟아낸다. 복잡한 일, 스트레스받는 일,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을
때 감정이 쌓이면 어딘가 배출해야 한다.
버려야 마음이 비워진다. 그럴 때 가장 힘없는 아이들이 감정의 하수구가 되기 쉽다.
성격이 좋거나, 여린 아이,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고 수용적인 아이는 가정에서
부모의 감정 하수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잔뜩 고인 감정을 폭발시키는 행동을 제공하면 기다렸단 듯 자녀에게 감정을 쏟아낸다.
마치 자녀에게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기다렸단 듯 화를 낸다.
자신의 화의 원인을 약한 자녀에서 쏟는 습관이 오래 지속하면 자녀는 정말 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의 감정 하수구가 누구인지 떠오를 것이다. 길길이 화가
날 때 퍼붓게 되는 한 사람, 그 사람은 십중팔구 가족 중에 있다.
화는 빨리 쏟아내고 편안해지고 싶을 때 터진다. 빨리 쏟아내는 사람은
그래서 뒤끝이 없을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 자녀는 가장 안전한 감정 하수구 역할을 한다.
화를 쏟아낼 때 자녀의 행동은 곪은
물집을 터트려주는 자극이다. 거슬리는 행동이나 말,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자녀의 행동
이 있어야 누가 봐도 화 낼 이유가 명백하니까. 자녀가 잘못해서 화를 내는 자신이 옳으니까.
부끄럽지만 이론이 아닌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