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위해 말해야 하는 이유/ 시어머니 사표는 없나요?
친정엄마가 올해로 팔순을 맞으셨는데 코로나가 한창이라 가족이 모여서 밥 먹자는 제안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다. 받고 싶은 선물이 있는지,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답이 없으시다. " 글쎄~ 내가 필요한 게 뭐가 있어야지." 한다. 구체적으로 함께 여행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면 이 나이에 무슨 여행이냐? 뒤로 뺀다. 이럴 때 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여행이 별로여서 그러시는 건지, 여행 비용을 자식들이 부담할까 봐 미안해서 괜찮다고 하시는지, 가고 싶은데 좋은 계절에 가고 싶은 건지 달리 생각해 둔 게 있는데 말하기 불편해서 괜찮다고 하는지 눈치껏 알아듣고 결정해야 한다. 난 친정엄마의 몇 겹을 두른 마음 안에서 원하는 바를 꺼집어내는 재주가 없어 짜증이 자주 난다. 그 재주를 가진 여동생이 엄마와 소통한다. 임경선 작가가 쓴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내용이다. 손님이 놀러 왔는데 어느덧 식사 때가 되어간다. 손님이 눈치껏 돌아갈 채비를 하고 현관으로 향하지 그제서야 안주인이 한마디 한다. “ 어머, 벌써 가시려고요? 오차Tm케라도 한 그릇 드시고 가시지 그러세요?" 이렇게 주인이 말을 슬쩍 내비칠 때 어떻게 반응해야 올바른 교토식 예절일까? 질문이다. 잠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첫째, 한사코 제안을 마다한다. 둘째, 못 이기는 척 오차 쓰게를 얻어먹고 간다. 여기서 답은 안주인 인사치레를 마다하고 일어선다 이다. 교토에서 ” 간단히 오차 쓰게라도 먹고 가실래요?“ 라는 말은 ” 슬슬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라는 신호이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며 일어서려는 찰나 주인은 또 한 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유 그런 섭섭한 말 씀 마시고 어서 드시고 가세요." 이 말에 쉽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다음에 또 놀러 오겠다며 호의에 충분히 감사를 표현하고 일어나야 양식 있는 교토인의 자세라고 한다.
책을 읽는 동안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면서 알게 된 남편 동료가 떠오른다. 일본에 살고 있는데 한국에 여행하러 왔다가 우리 부부와 식사를 하게 됐다. 남편은 그날따라 전골식 개고기탕을 대접한다고 음식점에 데려갔다. 메뉴가 괜찮냐는 질문에 고개를 흔쾌히 끄덕였고 먹으면서 맛있는지 물으면 " 맛있어요!"로 답한다. 당시 남편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전골식 개고기 전골이 몸에 좋고 맛있다고 같이 가자고 나에게도 얘기해서 따라간 적이 있다. 속으로 정말로 맛있어서 괜찮다고 말하는지 걱정이 됐지만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맛있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넘어갔다. 나중에 다른 일로 보신탕 먹은 이야기를 하면서 거절하지 않고 먹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고 한다. 나도 전골 근고기탕을 함께 먹는 남편을 보면서 혹시 일본인 동료를 놀리려고 데려간게 아닐까 의심했다. 일본인 동료는 그 음식이 뭔지 잘 모르고 끝까지 먹었음이 분명하다.
교토는 일본 문화유산이 그대로 남아있는 옛 도시다. 우리나라 경주와도 같은 곳이다. 교토에서는 상대가 당황하지 않도록 최대한 완곡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뭔가를 제안했을 때 ' 그것 참 좋군요'라는 답을 들으면 반은 퇴짜 맞은 거라 보면 된다.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하면 거절이라고 들으면 된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으니 기다려 봐야겠다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놓고 거절하면 상대가 실망하고 상처를 받을지 몰라 최대한 말을 빙빙 돌려 말꼬리를 흐리면서 말한다. " 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핵심은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드러내지 않고 눈치껏 상대 입장을 배려해서 말해야 한다. 듣는 사람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배려해서 알아서 의도를 파악하고 행동한다. 여기서 눈치껏이 중요하다.
교토식 소통법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나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요즘은 책을 내려는 사람들이 유행처럼 많아졌다. 책 쓰는 강좌가 우후죽순 돈 버는 인기 주제가 됐다. 알려진 작가들이야 출판사가 알아서 연락이 오겠지만 처음 책을 내려면 출판사에 글을 기고해야 한다. 달리 인맥이 없으니 발로 뛰어야 책을 낼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서점에 가서 책 표지에 있는 편집국 전화, 메일 주소를 하나하나 적어서 담당자와 통화를 한 후 글을 보냈다. 내 입장에서는 소중한 글이지만 출판사 메일에 하루에 수십 통, 수백 통 원고가 들어온다고 하니 출판 담당자 목소리로라도 만나고 싶어서다. 원고를 보내고 기다리는 시간이 딱 대학입시 발표를 앞둔 하루 전 그 심경이다. 열어볼 때마다 답이 보이지 않으면 초조해진다. 보통 열흘, 보름 정도 시간이 걸려야 메일 답이 온다. 그래도 답을 주는 출판사는 그래도 예비 작가를 위해 상당히 배려하는 회사다. 50여 출판사에 글을 보내면 답을 주는 곳은 대략 20여 곳 정도라면 그대로 제목, 목차가 눈에는 들었단 증거다. 메일을 열면 이렇게 적혀 있다. " 귀하의 소중한 원고 잘 읽어 보았습니다. 저희 출판사에 귀한 원고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충분히 검토한 결과 귀하의 책이 저희 출판사 편집 방향과 맞지 않아 출판에 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부디 소중한 원고가 출판될 기회를 갖길 소망합니다. " 이 말은 곧 100프로 거절의 의미이다. 여러 군데 출판사에서 이런 피드백을 받으면 아! 이 의례적인 답이 공적인 관계에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거절이구나. 처음 한두 번은 그래도 워낙 배려하는 말투라 일말의 기대를 갖게 되지만 곧 100프로 거절의 의미란 게 느껴지는 순간 좌절하게 된다. 결국 거절이라면 말꼬리를 최대한 흐려서 빙빙 돌려 돌려주는 완곡한 NO나 담백하고 솔직한 NO가 다른 게 있을까 싶다.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는 거절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나 싶다. 교토식 소통법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