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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정하 Sep 01. 2022

공부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친구

그림을 그리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 나온 여주인공 미정이 대사다.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아, 그래서 밤이 더 제정신 같아.

어려서 교회 다닐  기도 제목 적어 내는  있었는데 애들이   보고, 이런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기도한다고?신한테? 신인데?

, 궁금한  하나밖에 없었어.  뭐예요?  여기  있어요?(중략)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중략)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걷는 천국 따위는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이미 지난 이야기가 됐지만 최애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가 끝나고 얼마지 않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 시청 소감이 SNS에 올라왔다. 호기심이 생겼지만 눈 돌리지 않았다. 금방 갈아타기는 하지 않겠다는 심경이었다. 애인과 헤어지자마자 다른 사람을 만날 순 없지 않은가? 더구나 매회 본방 사수하고 넷플렉스에 올라온 재방 시청에, 드라마 대본까지 찾아 읽었던 드라마다. 드라마 대사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낀 건 처음이다. 희곡, 대본 장르는 듣는 문학이란 고정관념 탓이다. 대사는 해석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가슴에 꽂히는 빠른 화살과 같았다. '나의 해방 일지' 박해영 작가는 주인공 염미정처럼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작가이다. 인터넷을 뒤져도 오래된 인터뷰 말고 그녀를 알 수 있는 정보들이 많지 않았다. 세상에 나서서 주목받는 것보다 그 힘을 모아 세상에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관찰하고 공감하며 글 쓰는 섬세하고 따뜻한 작가 같아 마음에 끌렸다.



주인공 염미정이 독백처럼 무심하게 대사를 말할 때 얼굴이 훅하고 달아올랐다. 부끄러웠다. 어릴 때 기도문에 늘 '하나님! 성적, 원하는 학교, 친구관계에 덧붙여 엄마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알도록 해주세요' 적었다. 잠이 오지 않는 깜깜한 밤, 책상에 앉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엄마가 내 마음을 다 들어주도록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좋은 대학을 가게 해주시는 건 물론이고, 당연한 일이니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궁금했던 건 단 하나. 우리 엄마가 날 사랑하는지. 날 미워하는지. 내가 엄마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 고작 그런 걸로 기도했다. 어릴 때 온통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선생님의 관심 밖에 벗어나지 않을지.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을지. 남자아이들 관심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것들 때문에 고민했다. 지금 생각하니 생각할수록 창피하고 부끄럽다.



'나의 해방 일지' 대사가 그림 그리기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부끄러운 자기 고백까지 털어놓은 걸까? 맞다. 고작 성적, 원하는 학교,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공부 말고 다른 모든 활동은 무시하고 하잖게 여겼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그림 잘 그리는 학생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기 위해 밤을 새웠으며 그림 잘 그리지만 공부 못하는 애들은 눈을 아래로 깔고 봤다. 간혹 그림도 잘 그리고 공부도 잘하는 친구에겐 시샘, 부러움, 선망 같은 감정이 있었다. 친해지고 싶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말을 붙이지 못했다. 아마 그 친구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집 환경이 부유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릴 때 느꼈던 시샘, 부러움은 어쩌면 그림 잘 그리는 친구 부모가 내 부모보다 훨씬 멋질 거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생긴 감정이었다. 어린 나에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림도 잘 그리고 공부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림 잘 그리고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는 뭐든 하고 싶을 때 지원해주는 잘 사는 부모의 후광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후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다니고 결혼해 아이를 낳고 장성하게 키워낸 이 나이까지 그림 그리기에 시샘과 부러움이 있었다는 기억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다. 미술에 관심이 있다거나 그림 그리는 사람을 볼 때 나도 그려볼까 하고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림과 나는 그야말로 만난 적 없고 만날 일도 없는 사이였다.

지금 내가 뭐 대단하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부끄럽다. 풍경 스케치 몇 장 그리는 걸로 그림을 운운하는 자체가 우습다. 다만 가볍게 시작한 '여행 스케치' 그리기지만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 준 선물이 내 삶을 어떻게 달라지게 하고 있는지 말하고 싶어서 글 쓸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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