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정하 Oct 24. 2022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

그림을 그리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이자 현존 작가 최고 경매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0여 년 전, 정동 서울 시립미술관에 호크니 전시회가 열렸다. 그림에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친구가 '현존 작가 중 최고가 화가'라고 호크니를 소개받은 기억이 난다. 전시 관람 후 굿즈 판매 숍에 사람들이 인산인해였는데 영문도 모른 채 프린트 호크니 그림을 큰마음먹고 샀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달력처럼 둘둘 말아 사물함에 보관되어 있다. 어떤 그림이 인기 있는지 몰라 색이 강렬한 그림을 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잘못짚었다.

미술책이라면 학창 시절 미술시험 이후 한번 들춰본 적 없는 사람이 데이비드 호크니의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 책을 빌려 읽었다. 호크니의 가장 최근 책이기도 하고 코로나 시기 동안 노르망디 지역에 거주하면서 하루 1,2차례 드로잉, 그림 그리기를 놓지 않는 일상을 담고 있다. 호크니의 절친 마틴 게이 퍼드(미술평론가)와 주고받은 이메일, 편지 형식의 글과 함께 그의 그림 세계를 담고 있다.


그림에 조금 관심이 생기고 나서 읽으니 오호!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 이런 변화를 신기해하면서 혼자 흐뭇해하고 있다. 아이들 키울 때 이런 정도의 경험과 관심만 길러주어도 엄마 역할 다 한 걸 텐데 왜 그렇게 동기를 심어주기 어려웠을까? 아마 자신들이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 그럴 거다.

즐겁게 그린 경험, 기쁘게 참여한 경험, 다 함께 노래 부를 때 느낀 전율감, 오랫동안 기억에 맴도는 시구절. 이런 경험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다닐 때 한 과목 수강 후 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제대로 공부를 한 셈이다. 다음부터는 스스로 찾아가게 된다. 인기 있고 실력 있는 선생님들은 그 지점을 보고 강의를 한다.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를 읽으면서 환호를 질렀다. 야외 그림 스케치 작업 때 경험한 집중에 대한 이야기를 호크니가 말해서이다.

"평균 잡아 하루에 한 점 이상은 그립니다. 오후에 낮잠도 자지 않습니다. 작업에서 많은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죠. 많은 에너지를 말입니다. 정말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에는 나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라고 여기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의 집중 상태. 헝가리 출신 미국인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그것을 "흐름(flow)"이라고 부른다. "집중이 강렬해지면 무관한 것에 대한 생각이나 문제에 대한 걱정에 더 이상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자의식은 사라지고 시간에 대한 감각이 왜곡된다. 이 경험을 만드는 활동이 아주 큰 충족감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경험 그 자체를 위해 행할 준비가 된다."

미하이 칙센트가 말한 "흐름 flow" 상태일 때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다만 존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사라지고 그리는 동작만 남는다. 이때 아주 깊은 충족감이 생긴다. 그 순간 깊은 연결이 주는 충족감은 끊임없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동경을 불러온다. 호크니는 그림이나 드로잉이 분명 어려움이나 좌절감이 없지 않지만 그 과정이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고 그 순간이 영원히 자족적이라고 말한다.




어떤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그 순간의 영원한 자족, 만족감 자체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대 행복이다. 호크니는 "화가들은 오래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젊어서 죽거나 피카소, 마티스, 샤갈 또는 내 오랜 친구 질리언 에이리스처럼 장수하며 성공을 거둡니다. 그림을 그릴 때 아주 깊게 몰입하게 되어 자신의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화가뿐 아니라 글 쓰는 작가, 자신의 일에 아주 깊게 몰입하는 경험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에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그 순간 집중할 수 있다면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성공은 경제적인 부유함, 사회적인 지위가 아니라 '순간이 영원히 자족적'으로 느껴지는 경험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마라. 성공을 노리고 목표로 삼을수록 성공을 놓칠 가능성은 커진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추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뒤따라오는 결과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적합하고 당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한다면 성공은 따라올 수 있다.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을 한다면 어쨌든 가장 중요한 측면에서 당신은 성공을 거둔 것이다.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를 읽으면서 화가들이 자신의 방, 거실, 현관, 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 마당에서 꺾어온 싱싱한 꽃, 화분들 같은 사소한 풍경들을 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날마다 사계절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너른 들판, 나무 한 그루면 충분하다. 해가 뜨는 날, 날이 흐린 날, 바람 부는 날, 눈발 휘날리는 날 화가들은 풍경 속을 거닐고 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 화가들이 그리는 그림은 충분히 아름답고 멋지다. 어떤 환경에서도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화가의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팔순 이후 팔다리가 노쇠해 멀리 여행할 기력이 쇠한 그 나이가 화가들에게는 가장 빛나는 시간이다. 하루 종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햇빛을 관찰하면서 초록 들판 속에서 빛나는 빨간, 파란 기운을 포착해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다채로움이 있다. 가장 왕성한 활동의 시기가 죽음 직전, 이동이 불편한 한정된 공간 안에서 생활하는 나이이다. 예술활동이 주는 최대의 선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