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소녀님의 첫 발표

배우는 사람들 5

by 함께걷는제제

추석을 앞두고 재래시장에 다녀오다가 그분을 만났습니다.

추석 제사 준비를 하다가 빠뜨린 게 있어서 나오셨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이 끝난 지 벌써 1년도 넘었는데 학습자를 길에서 만나다니 얼마나 반갑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작년에 우리 프로그램의 92세 최고령 학습자 닉네임 "소녀" 님이셨습니다.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처음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6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글쓰기로 속 얘기를 끌어내 보고, 스스로를 보듬고, 힐링하는 시간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을 기획하였습니다.

강사를 섭외하고 프로그램 취지를 설명하면서 강의 계획을 짤 때도 강사님조차 질문이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글을 써 본 분들이 오실까요?"


부터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분들이 체력적으로 2시간 수업이 가능하실까요?"


아직 만나지 않은 학습자를 상상하며 수업을 만드는 강사의 입장은 참으로 걱정이 앞설 일이었습니다.

여러 경우의 수를 담으면서도 양질의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강사에게 마구마구 요구했습니다.

거기다가 이왕이면 다른 곳에서 수업을 경험하지 못했던 분들을 모셔서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강사님과는 멱살만 안 잡았을 뿐일 정도로 많은 요구사항을 집어넣은 수업 계획 안이 마침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는 홍보를 해야죠. 관내 복지관과 경로당이 주 홍보 무대였고 소녀님도 독거노인을 돌보는 생활지원사의 소개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셨습니다.


참여자 중에서 최고령 92세라는 연세만으로도 감동인데, 항상 소녀 같은 웃음을 지니셨고 그래서인지 첫날, 그분은 스스로를 "소녀"라고 이름 붙이셨습니다.




소녀님은 수업에도 꼬박꼬박 참여해 주셨어요. 공책과 연필과 지우개, 볼펜이 가지런히 담긴 필통을 넣은 에코백을 들고 화요일마다 수업시간 10분 전에는 도착하셨습니다. 며느님께서 수업에 가신다고 준비해 주셨다고 수줍게 웃으셨습니다.


우리 프로그램은 매 시간 마지막에 숙제가 나갑니다. 특정한 주제를 드리고 댁에서 글을 써오시게 했습니다. 다음 시간이 되면 한분씩 써오신 글을 읽어주시고 참여하는 학습자들이 합평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신랄한 평가보다는 공감과 격려로 훈훈하게 서로를 응원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셨습니다.






소녀님의 첫 발표날이었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이란 제목의 글감이 있었던 날입니다. 소녀님은 예의 순수한 미소를 보이시더니 숙제를 써오신 공책을 펼쳐 들고 천천히 읽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목이 메시더니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인데, 무슨 일이지?'


운영자로서 답을 구하려 강사님을 바라보았더니 강사님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이셨고, 여기저기서 학습자들이 눈물을 훔치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너무나 행복했던 어린시절이야기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둘러앉아 먹던 고구마와 동치미 이야기였습니다. 소녀님의 인생 최고의 날을 먼 옛날 가족들과 둘러앉아 고구마를 먹던 행복한 시간의 기억이었습니다. 연세가 아무리 많으셔도 동심은 그대로여서 더욱 감동적인 시간이었다고 다른 학습자분이 후기를 남기셨더군요.


그 뒤로 소녀님이 써오시는 글에서는 정갈함이 묻어났지만 학습자들은 시간여행을 하며 여러 번 눈물지었습니다. 숙제로 써오신 한 글자 한 글자의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소녀님의 얼굴은 10대 소녀처럼 빛이 났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음식하신 이야기, 어린 시절 형제간의 기억, 마음 아픈 세입자 이야기까지
웃음도 눈물도 함께 했던 우리 수업에서 소녀님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추석을 맞아 음식 준비하시고 저녁공기를 쐬고 계신 소녀님의 건강함에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 많이 나요."

지금도 그 공책에 이 얘기 저 얘기 당신의 이야기를 적고 계시다는 소녀님은 꿈꾸듯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어요.

그분의 정성 깃든 글씨 한 자 한 자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70 넘으셨다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행복한 추석이시겠다 싶어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이렇게 정정하신 소녀님을 다음 프로그램에서 꼭 다시 만나고 싶어서 두 손을 꼭 잡아드리고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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