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데이트의 중요성에 대하여]
워킹맘은 참 고되다. 하지만, 나 홀로 라디오 들으며 출퇴근하는 길, 가끔 휴가 내고 혼자 아울렛에 가는 꿀시간이 그 고생을 감내하게 해주곤 했다. 아이들이 말귀를 좀 알아듣고, 나도 나만의 꿀들을 더 찾아가기 시작할 수 있을 때에, 직장을 버려야 하는 기로에 놓였더랬다.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에게 편히 영어를 접하는 기회를 주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가 노랑머리 파란 눈 친구들과 정답게 하하 호호 웃는 모습을 상상하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나의 두 딸에게 학습 아닌 습득의 기회를 주자. 국제학교에서 뭘 가르치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고, 직장을 버리는 기회비용과 견주어서 내가 바란 건 그게 전부였다. 아이들이 영어를 한국어처럼 하는 그 모습말이다. ChatGPT가 클릭 한 번으로 번역을 해주는 지금, 뭘 그리 외국어에 집착하냐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대입을 위해, 유학을 위해, 취업을 위해 도서관에 앉아 끙끙대며 토익 토플 점수를 만들어내고도 말은 어버버한, 영어에 한이 서린 엄마였다.
한국나이 8살, 만 6.5세였던 큰 아이 등교 첫날, 아이를 학교 안에 들여보내고 몰래 숨어 지켜본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교실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더니 다양한 학년의 한국 아이들이 한데 모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얼음땡'을 한다. 아무리 작은 학교였다지만, 이건 뭐 거의 운동장을 장악한 수준이다. 입학 전 학교 투어할 때에는 학교에 이렇게나 많은 한국 아이들이 있을 줄 미처 알지 못했다. 투어하는 시간은 아이들이 모두 집에 간 후였으니까. 이건. 내가. 그렸던. 그림이. 아니었다.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후딱 손 닦여 간식테이블 앞에 앉혀놓고, 심문이 시작된다.
오늘은 점심 메뉴가 뭐였어? 체육 시간에는 어떤 게임했어? 모기 안 물렸어?
하지만 제일 궁금한 건 이게 아니지.
오늘은 쉬는 시간에 뭐 했어? 어떤 친구들이랑 놀았어? 새로운 외국 친구도 사귀었어? 무슨 말 해봤어? 말없이 철봉만 했어? 한마디라도 좀 해보지 그랬어. 어느 나라에서 왔대?
뭐라고? 아니 아니 이제 제발 무궁화 꽃은 그만 피우고...
호찌민 내에는 참 많은 국제학교들이 있다. 커리큘럼에 따라, 그리고 언어에 따라(베트남어 bilingual, 프랑스학교, 독일학교 등) 선택지가 다양하다. 하지만 개성 있고 가성비까지 좋은 알짜 학교라 하더라도, 한국인들 후기가 많지 않은 학교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착해서 현지에 몇 해 지낸 가정들에서는, 비록 한국인이 많지 않아도 내 아이와 잘 맞는 학교를 찾아 소신 있게 전학하는 모습들이 종종 보인다.) 결국 한국 부모들이 선호하는 규모와 시설, 평판을 가진 학교들을 추리면 개수를 손에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손에 꼽는 학교들에는 생각보다 많은 한국 아이들이 있다. 우리 반에 없다고 안심할 게 아니다. 옆반에 있고, 윗학년 아래학년에 분명히 있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똘똘 뭉치는 것이 우리 한국 아이들이다. 국제학교를 얼마나 오래 다녔든 간에 유창한 영어만큼이나 한국어도 유창하다. 한국어로 정교하게 감정을 교환하며 생활하고 있고, 한국 유행어와 따끈따끈한 최신 놀이들도 빠르게 공유된다. 우리 아이가 외국인 친구와 단짝이 되어 영어로 소꿉놀이 하기 바랐던 엄마로서는 다소 속상한 상황이다.
자, 이제 K-엄마가 나설 때이다. 그것은 바로 플레이데이트 만들어주기이다. 플레이데이트는 어릴수록 빈번하다. 이곳에서는 외국 엄마들과 주로 Whatsapp으로 소통하는데, 한국나이 5살인 둘째의 경우 하루가 멀다 하고, 오늘 끝나고 어디서 놀아요, 어디 갈 건데 올사람 오세요.라는 메시지가 보였었다. 그런데 이게 모두에게 오느냐? 그렇지 않다. 이른 아침 아이 교문 들여보낸 후 커피 한 잔 함께 마시고, 하교시간 아이들 데리러 갈 때마다 스몰토크를 쌓아가고, 메시지 리액션도 열심히 해주어야 한다. 성실한 엄마에게 더 많은 기회가 온다. 아이를 위해 여기저기 플데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끝나고 집에 오면 저녁밥 차릴 기운이 없었다. 아이는 플레이라지만, 동시에 엄마는 토킹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들어야 엉뚱한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에너지를 다 쓰고 기진맥진 돌아오기 일쑤였다.
고민하는 엄마들에게, 플레이데이트 노동에 집착하지 마시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엄마의 정성이 꽃을 피워, 내 아이가 외국인 친구와 내내 함께 붙어 지내며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단어를 뱉어낼 수도 있다. 엄마 리스닝 수준이 향상되고, 순수하게 엄마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순기능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피나는 노력과는 무관하게 아이는 혼자 멀찍이 떨어져 모래놀이만 하고 있기도 하고, 데이트 때만 잘 놀지 학교에서는 그 친구와 모른 척을 할 수도 있다. 그 자리에 있는 한국 친구와만 놀고 오기도 한다. 실제로 아이들이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는 것은 아이 귀가 어느 정도 트이고 본인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때부터이다. 아이의 영어가 아직 서툴다면, 초반에 너무 기운을 빼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아보자.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한국인이 둘 이상이라면, 그들의 교류, 한국어 사용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해도 되는 것은, 차차 알아서 외국 친구들과도 관계를 형성해 간다는 점이다. 영어의 성장과 더불어 서서히.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국제학교의 수업은 둘씩 짝을 지어, 혹은 여럿이 그룹을 만들어하는 활동들이 많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화할 수밖에 없다. 눈치코치로 선생님 지시사항을 듣고 친구들 따라 그리고 쓰고 줄서고 간식 먹고를 해낼 수밖에 없다. 설사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오롯이 한국 친구들과 얼음땡 하며 보낸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생활 영어를 습득할 기회는 교실에서도 충분하다. 우리 아이 이미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흘려듣기 진행 중이다. 아이는 낯선 환경에서 쉬는 시간마다 들리는 한국어 한마디에 마음의 안정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외국인 친구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는 엄마 탓도, 엄마 덕분도 아니다. 게다가 핵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국적과 무관하게 본인들과 케미가 맞는 친구들을 찾아 어울린다는 점이다. 엄마가 억지로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매우 활달한 첫째 딸의 경우, 학교를 뱅뱅 돌며 수다 떠는 것을 즐기는데 똑같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캐나다, 말레이시아 친구 두 명과 삼총사로 지낸다. 그리고 첫째에 비해 다소 조심스러운 편인 둘째는, preschool 때는 차분한 인도네시아 친구와 단짝이더니, 지금은 비슷한 성격의 한국인 친구 몇몇과 잘 지낸다. 부디 얼마나 많은 영어를 습득해 왔는지 매일 확인했던 나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아이에게 시간을 주고 기다리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더 이상 친구 국적에 대해 물어보지 않기 시작한다면, 아이가 알아서 외국인 친구 엄마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가져올 것이다. 가방에 생일파티 초대장을 넣어올 것이다. 혹은 우리 아이가 당신 아이와 놀고 싶어 하니 플레이 데이트 하자는 whats app 메시지가 울릴 것이다. 처음부터 말고, 우리 그때 나서 주자. 잘 맞는 친구와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가능할 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