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 부모에게 요구되는 영어실력 얼마큼-회화 편]
취업준비 이후 십수 년을 영어 스트레스 없이 평화롭게 살다가, 다시 이놈의 영어를 마주하는 순간이 왔다. 아이들 국제학교 선택을 위해 각 홈페이지들을 둘러보는 것부터가 그 시작이었는데, 너무나 오랜만에 목적을 갖고 영어 문서를 읽으려니 속이 울렁거렸던 기억이 난다. 읽다가 어디까지 읽었는지 잊어버리고, 중간에 자꾸 다른 생각이 나서 여러 번을 다시 읽으며, 큰 아이에게 엄마 지금 심각하다고 방문 좀 닫겠다고 했었더랬다. 당장 화상영어 수업이라도 들어야 하나 걱정만 하다 정신없이 출국일이 되고, 그리고 이렇게 4년 반이 흘렀다.
아이들을 국제학교 보내려면 엄마는 얼마큼 영어를 잘해야 할까. 학교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아이들 학습 서포트를 위해, 잘하면 잘할수록 편리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걱정할 만큼 힘든 상황은 없으니 염려 말고 똑똑하게 최소한을 해내자는 게 내 결론이다. 국제학교 생활에서 엄마의 영어가 필요한 경우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는 것은, 미리 상황들을 예측하고 용기를 가져보자는 취지이다.
당신 영어가 변변치 않으니, 적당히만 해도 된다고 얘기하는 거 아니오?!라고 하실지 몰라 참고로 적어보자면, 필자는 영어영문학 학위와 교원 자격증이 있고, 잠시 미국에서 영어학을 공부했으며, 라떼는 토플이 CBT였는데 270점 정도로 기억한다. 엄청난 스펙이 아닌 데다, 12년 직장생활 중 영어 쓸 일이 없어 중1 수준으로 퇴보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영어 문외한 정도는 아니니 나의 경험이 약간의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학교 투어를 할 때부터 본격적으로 실전 회화가 시작된다. 입학팀에 한국인 직원이 있는 경우가 있다지만, 인터뷰 보는 선생님과 인사도 나누어야 하고, 교장 선생님과 짧은 면담을 하는 경우도 있다. 입학 단계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분들은 흔들리는 동공을 보고 이미 내 수준을 파악해 버린 프로들이다. 나처럼 말하기에 울렁증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보았겠는가. 친절하게 천천히 이야기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단어들만 연결해 질문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테니 당당해도 괜찮다. 우리는 일 년에 몇 천 학비를 내 줄 '고오급 클라이언트'이다.
유니폼 샵에서 유니폼을 사거나, 셔틀버스, 식단과 같은 문의를 위해 리셉션을 찾아야 한다면, 오히려 더 마음을 편히 가져도 괜찮다. 많은 직원들의 국적이 베트남인데, 나는 학교에서 일하는 행정 직원들에게 불만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너도 나도 원어민이 아니니 영어에 서툴러도 널리 이해해 주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국제학교에서 일하는 직원들 스스로 큰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천천히 물어보면 천천히 대답해 주는 그들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면 관련한 자료를 종이로 내어 보여줄 것이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내 질문을 메일로 답변해 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우리 아이들 학교의 유니폼샵 직원은 전교생 이름을 모두 다 외우고, 알아서 사이즈를 찾아줄 정도로 일에 애착을 가진 분이었다. "큰 애는 이 정도 입어야 돼, 둘째는 살이 없으니 이거 해야지."라고 말이다.
엄마들 모임에서는 어떨까. 네이티브 스피커들은 그들의 속도로 온갖 관용구를 다 써가며 미드처럼 이야기를 한다. 끼어들 타이밍이 쉽지 않다. 자기들만 알아듣는 주제로 돌려버리거나, 나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노랑머리 엄마들이라면, 그분들은 그냥 멀리해도 괜찮다. 천천히 눈 마주치며 내 대답을 기다려주는 천사 같은 파랑눈 엄마들도 참 많기 때문이다. 이전의 글에서 언급했던 아이들 친구 관계와 마찬가지로, 엄마들 간의 관계도 결국은 언어보다는 캐릭터이다. 오래 편히 지내는 외국인 엄마들에게서는 내 한국 친구들과 비슷한 면들이 많이 보이니 말이다.
네이티브가 아닌 엄마들과의 대화는 조금 더 편안하다. 호찌민 내 국제학교에는 베트남 아이들도 참 많은데, 부모 중 한 명이 외국인이라 외국 국적을 가진 경우가 흔하다. 배우자가 원어민인 베트남 엄마들의 경우 영어 실력이 네이티브와 다름없지만, 비영어권 엄마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조금 더 배려가 느껴진다. 일본,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프랑스 등 네이티브가 아닌 엄마들과는 사용하는 단어들이 매우 심플하다. 초반에는 원어민이 자주 쓰는 구동사들을 열심히 외우기도 했었는데, 점점 게을러진 게 이 때문이다. 쉬운 단어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오해가 없다. 이야기하다 막히면 옆에서 단어를 거들어주기도 하고, 구글에서 얼른 이미지를 찾아 '이거잖아, 이거 말하는 거야' 하고 도와주기도 한다. 겁내지 말고 다가가면 포용력 있는 부모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한국인은 학교 내 커뮤니티도 아주 잘 되어있어, 사실 필요한 정보들을 얻는 데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같은 해프닝을 두고도 문화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참 다르구나 느낄 때가 있다.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친분을 쌓은 외국인 엄마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참 귀중한 기회이다. 유창하지 않더라도 가끔 차 마시며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기초 회화는 공부하길 권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이다.
넘어야 할 큰 산은 컨퍼런스(면담)이다. 내 아이와 함께 교실에 들어가 지난 몇 주간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해 설명을 듣는 컨퍼런스가 있고, 담임과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컨퍼런스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내 아이 설명만 듣고 선생님과는 짧은 인사만 나누어도 괜찮다. 후자의 경우가 국제학교 엄마가 영어로 가장 잘 말해야 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담임과의 면담에서 중요한 것은, 영어 실력이 아니다. 소통만을 위해서라면 미리 학교의 한국인 선생님에게 동석을 부탁드리거나, 학교 측에서 영어 잘하는 한국 고등학생들을 통역사로 연결해 주는 서비스에 신청해도 된다. 내 아이의 학습태도와 성취도, 교우관계, 그리고 가정에서 도와야 할 부분들이 무언지 미리 상세 질문지를 만들고, 귀중한 의견을 받아오는 것에 포커스를 두어야 한다. 준비한 만큼 성실한 답변을 얻을 수 있고, 가정에서 적극적으로 아이를 케어한다는 인상까지 줄 수 있어 추후 어플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에도 같은 결의 성실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결국 국제학교 학부모에게 요구되는 영어 회화 실력은 리스닝과 스피킹 초급, 대신에 당당함과 부지런함 고급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