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심을 넣어두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는 바람에 깼다. 날씨 어플을 봤다. 맙소사, 어제는 그렇게 날씨가 좋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비만 올 예정이다. 일단 잠을 더 청했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정말 우중충했다. 밥을 먹고 씻으면 조금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일단 오전 시간을 호텔에서 느릿느릿 보냈다. 정오쯤 커튼을 쳤더니 거짓말처럼 쨍-하고 해가 떴다. 나가자!!
일단 나는 맛있는 커피가 너무너무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어제 동행 덕분에 산 유심을 활성화시키고 싶었다. 호텔 근처에 있는 제일 만만한 스타벅스로 향했다. 스타벅스. 여행 다니다 보면 정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나의 별다방. 첫 번째로 모든 메뉴와 이름이 익숙하고, 두 번째로 팡팡 터지는 와이파이, 마지막으로 친절한 직원들. 사실 요즘 세상에 어느 카페를 가도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고, 메뉴도 어렵지 않고, 어차피 메뉴 시킬 때 한번 보고 말아 버릴 직원들이긴 하지만 스타벅스는 심신 안정용이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가장 편안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유심칩을 꺼내 들었다. 유심칩을 끼고 vivo 어플을 설치하고 이것저것 눌러봤는데 아무리 해도 못해먹겠다. 현지인은 금방 뚝딱 할 수 있으려나 싶어 직원에게 하는 방법을 물었다. 그녀도 이것저것 눌러보더니 잘 모르겠다며 미안해한다. 다시 자리에 앉아 해봐도 데이터를 쓸 수가 없다. 한 삼십 분이 지났나, 아까 그 직원이 내 옆에 앉아서 본인 시프트가 끝났다며 본격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브라질에 대한 경계심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는 삼십 분 동안 손바닥만 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결국 나는 데이터를 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우리는 20분 정도 수다를 떨었다. 갑자기 그녀는 서비스직(hospitality)을 앞으로도 하고 싶어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고, 스타벅스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나와 영어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게 좋다며. 본인 말을 잘 알아듣겠냐고 묻길래 원어민도 아닌 심지어 동양에서 날아온 나는 아무 문제없다고 칭찬을 해줬다(?). 그리고 나도 호텔에서 일을 하던 사람인데 덕분에 유심도 활성화시켜서 너무 마음이 편하다고 앞으로 어떤 서비스직군을 가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줬더니 도리어 나에게 너무 고맙다며 해맑게 웃는 게 아닌가. 왜 내가 뿌듯한 거지. 대학 시절의 순수? 했던 나의 모습도 생각나고, 도움을 줘서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든 표하고 싶어 '너무 고마워서 그런데 밥 같이 먹을래?'라고 물었더니 오늘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대신 SNS 아이디를 공유하고 그녀는 떠났다.
신기했다. 여태껏 모든 사람들을 경계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내가 조금 우스웠다. 그녀가 추천해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고, 이젠 그 누구든 눈이 마주치면 웃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밥 먹고 나왔더니 날씨가 조금 흐려졌다. 화장실도 갈 겸 숙소에 가서 옷을 바꿔 입고 한국인들에겐 빵산으로 알려진 Pão de Açúcar (빵지아수카르)로 갔다.
긴 케이블카를 타고 높은 전망대로 갔다. 오전에 봤던 일기예보대로 갑자기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더니 안개로 보이는 게 별로 없었다. 약 2만 5천 원 돈이나 내고 올라왔는데 안개뿐이라니. 그래도 곧 비는 그쳤지만 안개는 그대로였다.
이곳이 야경 보기엔 제격이라고 하던데 헛걸음을 했나 하는 아쉬운 마음에 일단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벤치에 앉아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멍 때리면서 보고 있었다. 나처럼 놀러 왔는지 한 무리들이 옆에서 왁자지껄 웃는다. 나도 친구들이랑 왔으면 비가 오고 안개가 껴도 저렇게 배꼽 빠져라 웃었겠지라며 생각하는데 갑자기 그들이 다가오더니 사진을 찍어달라길래 한국인 특성상 대충 찍어주는 법은 없다. 한두 번 찍다가 여기는 별로니 쫌만 옆으로 가보라며 열심히 찍어줬다. 어찌어찌 대화를 해봤더니 아르헨티나에서 여행 온 사람들이었다. 서로 사진 찍어주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점점 안개도 걷혔고, 내가 생각하는 야경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어느 나라, 어느 도시건 야경은 늘 옳다. 틀린 법이 없다. 가로등으로 둘러싸인 바다와 노을로 붉어진 핑크빛 하늘을 보고 사진을 연신 찍어대는 나는 관광객은 관광객이었다. 바다 뒤로 세워진 높은 빌딩과 바다 앞쪽에 늘어진 요트들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는데 낮에 봤던 쇠창살 대문과 어제 봤던 파벨라 때문인지 이질감도 조금 느껴졌다.
하긴, 야경은 보통 대도시에 들쑥날쑥 지어진 높고 화려한 빌딩을 보는 것이긴 하니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안개 낀 핑크빛 하늘을 보고 있자니 너무 행복하다. 가족들도 생각나고, 친구들도 생각난다. 사색에 잠겨보려고 했더니 멈췄던 비가 제법 다시 내린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서 우버를 불러 숙소로 돌아갔다. 신이 난 나는 데스크 직원들에게 평소보다 크게 인사를 하고 올라갔다.
이 날 빵산에서 내려봤던 야경과 하늘, 그 분위기는 이상하게도 더 아름다웠고,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리우보다 더 화려한 야경을 볼 수 있는 곳도 있고 노을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건데 왜?라고 묻는다면 글쎄. 아마도 잔뜩 팔다리에 힘을 주고, 어깨를 움츠리고,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던 첫 하루가, 바지 허리춤에 핸드폰을 넣어 티셔츠로 가리고 다녔던 그 하루가 나에겐 너무나 컸을까. 그 모든 경계심과 의심들이 스르르 없어지는 첫날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세상이 세상인 이유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 정말 사람 사는 세상이다. 다를 거 없다, 이 쫄보야. 어차피 4개월 집 나와 있어야 하는 거니까 제대로 즐기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