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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크나인 Nov 16. 2020

나는 퇴사했고 아내는 창업했다

백수의 꿈

13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둔 지 정확히 두 달이 지났다.


사표를 낸 뒤 지난 두 달간 휴식과 재충전을 핑계로 경제활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당분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릿속을 비운채 지내고 싶었다. 13년간 쉼 없이 움직여온 내 몸과 감정소비에 지쳐간 내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싶었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마음껏 늦잠도 잤고 밤새도록 여러 편의 영화도 봤다. 한적한 카페에 홀로 앉아 커피 한 잔과 책에 빠져 보기도 했다. 코로나 19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라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여행을 가지는 못했지만 책과 영상을 통해 간접 경험도 했다.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리스트로 작성해 하나씩 지워가리라 다짐도 했다.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에도 아내는 내 뜻을 존중해줬다. 퇴사 후 인생의 반환점에 다시 설 때까지 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하라고 응원도 해줬다. 눈물이 핑 돌만큼 고마웠다. 나의 고충을 아내만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밤새 게임을 하느라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내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지 못해도, 하루 종일 씻지 않고 잠옷 바람으로 집안을 휘졌고 다녀도 아내는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아내는 방송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하다 2년 전 사표를 냈다. 왕복 80km 가까운 출퇴근 거리도 일에 대한 아내의 열정을 가로막지 못했지만 쓸데없는 감정노동에 아까운 세월을 보내기 싫다며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결혼 4년 차인 우리는 돈 관리도 줄곧 각자 해오고 있다. 외식을 하면 연애할 때처럼 “오늘은 내가 낼게”, “오늘은 내가 사줄게”하며 번갈아 낸다. 둘 중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은 “잘 먹었어”라고 화답한다. 장을 보거나 필요한 물품을 사도 내고 싶은 사람이 계산을 한다. 한쪽이 너무 자주 낸다는 느낌이 들면 “오늘은 내가 낼게”라고 다른 한쪽이 말한다. 공용으로 들어가는 비용은 웬만하면 반씩 부담하고 공용으로 수익이 생기면 철저하게 반으로 나눈다. 다만, 서로의 비용 지출에 대해 '과하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으면 가감 없이 말해준다.


부부로서 같이 살아가지만 서로 존중하면서 한 인간으로 각자의 사생활은 지켜주자는 취지다. 암묵적인 약속인 것이다. 물론 상호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으면 먼저 본 사람이 고무장갑을 낀다. 먼지나 머리카락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아무나 먼저 청소기를 집어 든다. 그러면 다른 한 사람은 같이 청소를 하거나 세탁기를 돌린다. 한 사람이 집안일을 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절대 소파에 몸을 붙이고 있지 않는다. 회식이 있어 귀가 시간이 늦어도 아내는 '언제 와?'라는 전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사회생활하는 사람이 알아서 하는 거지, 작은 일로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나는 1차만 마치고 집에 들어간다.


아내는 늘 꿈이 명확했고, 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했다. 건강과 헬스에 관심이 많고 비만과 유전자의 관계도 궁금해하며 관련 도서를 독파했다. 실버산업과 어린이의 행복지수에도 깊은 관심이 있다. 대한민국 산업 발전과 건강한 사회,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어르신들에게 안락한 노후를 제공하는 게 그의 꿈이다. 국가의 미래인 어린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주변 인프라를 개선하는 것이 바로 아내의 꿈이다.


반면 나는 대학생 때까지도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뭐가 되고 싶은지 정확하지 않았다. 직장을 관둔 지금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각의 끈을 쉽사리 풀지 못하고 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지만 머리는 계속적으로 심장을 옥죈다. 칼 같은 이성이 흐리멍덩한 감성을 몰아붙인다. 깜깜한 미래에서 하루빨리 찬란한 빛을 찾기를 바란다. 이런 나를 보며 아내는 스스로 풀어보라는 양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만을 심어준다.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꿈을 위해 정진하는 아내의 꿋꿋함을 보면 대견하면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사실 결혼 전부터 아니,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꿈이 있는 여자가 이상형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망설임 없이 전하는 여자가 좋았다. 남자든 여자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비단 그 꿈이 무엇이 됐든 다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버리고 희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꿈이 있고 주관이 뚜렷한 아내는 직장을 그만둔 지 정확히 2년 만에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전자, 유통 쪽이지만 자신의 꿈을 위한 마중물이라고 했다. 사업자등록증도 나왔다. 사업자등록증이 나온 날짜에 맞춰 아내에게 떡케이크를 보냈고 축하 메시지도 전했다. 아내는 건강한 사회를 꿈꾸는 건설적인 사람이다. 새로운 도전을 택한 아내의 앞길을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응원한다. 비록 나는 퇴사해 백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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