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미드 중독자의 주절거림

by 김정민

광우병 사태가 있었고,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12월 3일 밤이 있었다. 굵직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나는 광장에 나갔다. 어떤 단체에 속해 있던 것도 아니고, 정치 활동을 꾸준히 해온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어떤 순간들은, 집에 앉아 있기에는 너무 시끄러웠고, 너무 견딜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목소리 하나 보태는 것, 머리 하나 더 얹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그 정도의 참여는, 적어도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다는 후회만큼은 남기지 않게 해준다고 믿었다. 나는 여전히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다만, 그 믿음이 언제부터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요즘 뉴스를 볼 때면 마음이 흔들린다. 20대의 보수화,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절반의 여론. 한국 사회는 흔히 ‘다이나믹’하다고 말하지만, 대중의 움직임은 갈수록 이해하기도, 예측하기도 어려워진다. 세상은 여전히 ‘먹사니즘’이 지배하고, 재산의 증식과 남의 것과 나의 것을 줄 세우는 데 열중하는 풍경은 좀처럼 달라질 기미가 없다. 그런 사회에서 더 나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일은 어느새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정치에 대해 무채색의 균형을 지킨다고 말하는 언론, 그리고 세상을 떠난 전직 대통령을 학생들이 비하하며 놀이처럼 소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언제부터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틀린 것을 틀리다고 비판하지 못하는 사회가 된 걸까. 이것은 과연 예전보다 나아진 모습일까. 회의가 깊어질수록,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하다는 신념과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에 자리 잡은 내 안의 틈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간다.


미드 <웨스트 윙> 시즌 4의 20 화 제목은 "Evidence of Things Not Seen". 성경에서 가져온 말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곧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웨스트 윙>은 백악관 웨스트 윙(서관), 즉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이 일하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정치 드라마다. 현실보다 이상에 가까운, '더 나은 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십여 년도 전부터 이 드라마를 여러 번 반복해서 봤다. 그런데 특별히 재미있지도 않고 전개도 느릿한 이 에피소드가 유독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야기는 춘분날로 시작한다. 서양에서는 춘분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자정이 되면 달걀을 똑바로 세울 수 있다는 미신이 있다. 웨스트 윙 스태프 중 오직 한 명만 그것을 굳게 믿고, 계속해서 달걀을 세우려 애쓰지만, 나머지는 미신이라며 코웃음 친다. 하지만 이 작은 장면은, 드라마의 중심 질문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이 정치가, 정말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혹시 이 미신처럼, 현실 정치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바람이 아닐까?”


드라마 속의 그날 하루에 여러 사건이 발생한다. 러시아 영토에 추락한 미군 정찰 무인기를 두고 백악관은 거짓 해명으로 시간을 번다. 그 시각 백악관 건물을 노리고 총성이 울리고 스태프들은 몇 시간 동안 백악관을 나오지 못한다. 백악관 법률보좌관에 지원한 후보는 자격이 충분했지만 어딘가 미심쩍어 선뜻 결정하지를 못한다. 뜨거운 신념과 이상으로 정치를 시작했던 그들은 위협과 불신, 냉소로 움츠러들어 있었고, 그들의 정치는 어느새 차갑고 기계적인 공학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으나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계속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드라마는 그렇게, 조용히 묻는다.


그리고 나는, 끝끝내 달걀을 세우려 애쓰던 그 스태프를 떠올린다. 모두가 미신이라며 웃어 넘기는 순간에도, 그녀는 몇 번이고 손에 달걀을 쥐고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번번이 쓰러지고, 그럴수록 더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어쩌면 정치라는 것, 그리고 우리 안의 이상 또한 그래야 하는 것 아닐지. 현실 앞에서는 늘 불안정하고, 조금만 방심해도 금세 넘어지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워보려는 마음 자체가 의미가 되는 것. 신념과 현실 사이에는 분명 커다란 벽이 있고, 그 앞에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 깊은 틈이 놓여 있다. 그 틈을 단숨에 건너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돌아서지는 않는 것. 웃음과 냉소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손을 뻗어보는 것. 나는 정치가 그런 마음에서 완전히 멀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나 역시 그 마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를 바란다. 끝내 돌아서지 않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