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없는 세계

경계에 선 인간의 질문

by 김정민

‘신이 없는 자리’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聖)과 속(俗)」을 읽었다. 종교학자인 엘리아데는 70 여 년 전, 인간을 본질적으로 '종교적 존재(homo religiosus)'라고 정의했다. 그에게 종교란 실존적 위기에 대한 모범적인 해결책, 즉 혼돈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신성한 의미 체계였다. 그는 과학과 합리성이 세상의 신성함을 벗겨낸('탈성화') 현대 사회 속에서, 삶의 방향을 알려주던 절대적인 좌표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정처 없이 떠도는 난파선의 선원처럼 실존적 불안 속에 내던져졌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통찰은 철학자 한병철이 「리추얼의 종말」에서 말하는 '의례(ritual)'가 사라진 현대사회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한병철에게 의례란 단순히 반복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에 안정적인 질서를 부여하고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사회적 접착제'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성과와 효율을 중시하는 현대사회는 이러한 의례를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했다. 그 결과, 안정된 소속감 대신 끝없는 자기계발의 압박만이 남았고, 우리는 함께 머무는 법을 잊은 채 각자도생하는 '의례 없는 인간'으로 전락했다고 그는 비판한다.


나는 과거 개신교도였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종교를 떠났다. 그것은 단지 종교에 대한 환멸이나 회의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결핍을 살아보겠다"는, 내 삶을 향한 하나의 결심이었다. 신이 빠져나간 자리엔 결국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그 빈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엘리아데의 인식을 일정 부분 인정한다. 그의 말대로, 내 안의 종교적 구조는 단지 탈성화되었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말한 성과 속 중간 어딘가 서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나는 신의 자리를 스스로 비운 사람이다. 그 빈 공간을 다시 채우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엘리아데가 말한 '탈성화된 현대인'과는 다르다. 그의 현대인은 의미의 중심을 상실한 채 방황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중심을 의심했고, 그 자리를 비움으로써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려 했다. 그 결핍 그 자체를 살아보는 것, 그것이 나의 선택이다.


나는 인식론적으로 ‘경계인’이라 할 수 있다. 종교를 떠났지만, 태생적 무신론자도 아니다. 신의 흔적과 결핍 사이, 이성적 종교인과 완전한 탈종교자 사이 그 어딘가 서 있다. 확신도 없고, 구조도 없지만 그 어중간함을 피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이 고독을 ‘순례자의 여정’이라 부르고 싶다. 그 순례를 통해 나는 묻는다. 신 없이, 인간은 어떻게 삶을 구조화할 수 있을까? 내가 버린 건 종교이지만, 그 자리에 남은 공허를 무엇으로도 덮지 않고 살아갈 때 나는 어떤 언어, 어떤 감정,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신 없이도 질문할 수 있는가? 신이 없는 자리에서도 나는 여전히 진리, 정의, 의미,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이 질문들은 진정한 질문인가, 아니면 신의 부재를 부정하지 못한 그림자놀이일까.


현대엔 이성을 유지하면서도 종교적 삶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각자의 삶에 맞게 믿음을 조율하며 실존적 위기를 넘어선다. 논리와 이성으로 사회생활을 하되, 무리하게 신을 증명하지 않고 필수 영양분처럼 일정한 믿음을 유지한다. 나는 그런 삶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 또한 삶을 지탱하기 위한, 정직하고 솔직한 태도라 생각한다. 나는 신을 잃었지만 질문을 얻었다. 그 빈자리를 성급히 다른 무언가로 채우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그 결핍과 공허를 똑바로 응시하는 데서 나의 사유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의미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미를 묻는 치열한 과정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찾은 단 하나의 진실이다. 의미 없는 세계 앞에서, 나는 의미를 묻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