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 무신론자의 변
대학생 때까지 10년 정도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 사람이 부족한 개척교회여서, 학생회장이나 성가대 지휘 같은 직책들도 차례가 되면 맡았다. 믿음이나 영성이 충만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매주 예배를 비롯한 교회 활동들은 내 삶의 중심이었다. 그러던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 '인식론'의 세계를 접했을 때, 내 안에 오래 쌓여 있던 세계의 경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모든 앎은 증명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그 엄격한 요구 앞에서, '믿음'이라는 단 하나의 기둥 위에 서 있던 나의 세계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더구나 지난 학생 운동의 영향으로 유물론의 풍토가 남아있던 문화 속에서 사람들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믿음을 붙잡으려 애써봤지만, 그 신앙 위에 세운 나의 세계관으로는 내 주변 사람들과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선명해졌다.
시각이나 촉각으로 인식하는 책상 같은 사물도 그 실체에 대해 의심해 보는 철학의 접근에 따르자면 달리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없었다. 믿음이라는 의식의 토양에서 자라난 세계관은 날카로운 질문들 앞에서 위태로웠다. 마치 다른 언어를 말하는 이국의 광장 한가운데 홀로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선택해야 했다. 믿음을 내려놓을지, 아니면 대화를 포기할지. 믿음을 유지한 채 세상과 양립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나는 그 두 체계를 함께 지탱하는 방법을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난 신앙을 내려놓았다. 한 번에 결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회에는 오래된 관계들이 있었고 때문에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유지하다가 군입대를 핑계로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신앙을 버렸다고 해서, 내 안의 그 자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영원’, ‘진리’, ‘정의’ 같은 단어들은 이름을 바꾸었을 뿐, 여전히 내 의식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도 어떤 확실성, 어떤 궁극적 질서, 어떤 선함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인식은 유한하다. 우리는 지구의 시간과 중력,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의 감각과 사고는 생존에 유리하도록 구성된 장치이며, 그 너머의 세계를 온전히 포착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다만 나는, 그 한계를 인정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질문이 시작된다고 느낀다.
인간은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를 가정하며 살아간다. 설명되지 않는 세계 앞에서도 우리는 반복과 법칙, 의미를 추적한다. 그것이 신이든, 의지이든, 아직 이해하지 못한 어떤 구조이든, 우리는 무질서 너머에 무엇인가 있다고 전제하며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궁극적 의미란 발견되는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멈출 수 없이 향하는 방향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우주의 질서가 차갑고 무심한 법칙에 불과하다 해도, 인간 세계는 그렇게만 유지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느끼고, 위로를 건네며, 사랑과 인내를 배우는 존재다. 위로와 사랑, 인내는 초월적 명령이라기보다, 고단한 삶을 함께 견디기 위한 인간의 결단에 가깝다. 신이 있든 없든, 인간 세계에는 온기가 필요하다.
나는 교회를 떠났지만, 내 안의 종교적 구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특정 교리를 향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와, 서로를 향한 온기를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덕목으로 남겨 두려 한다. 신이 있든 없든, 우리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그러나 그 고단한 삶 속에서 질서를 묻고, 의미를 묻고, 서로를 붙드는 질문을 계속하는 한, 우리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철학이란 신의 빈자리를 채우는 작업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인정한 채 서로를 향해 살아가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평화의 기도’라는 성가가 있다. 고등학교 합창부에 잠시 몸담았을 때 배웠던 노래로,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곡이다. 나는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오래전에 떠나온 교회의 공기를 잠시 떠올린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이제 더 이상 초월자를 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다짐에 가깝다. 신을 부르지 않더라도, 그 문장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고자 하는 마음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결단일 수 있다. 위로받기보다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려는 태도는 초월을 약속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서로를 버리지 않기 위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진리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