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읽고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며칠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혼자서 사막을 여행하는 건 여간해선 힘든 일일 것이다. 현실에선 대도시 위주로 여행을 다니는 내가 왜 이런 꿈을 가지고 있을까. 난 도시에 산다. 도시에 산다는 건 편리하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나는 종종 살아 있다는 실감을 잃는다. 출근길에 보는 회색 건물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정,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어느 순간부터 내 하루는 ‘복사-붙여 넣기’ 된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얕고, 날씨도 계절도 빠르게 지나간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은 왜 점점 사라져 가는가?”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던 질문이었다.
그러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읽었다. 책 속에서 그는 ‘아우라’를 “가까이 있어도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현존”이라 불렀다. 한 번뿐인 시간과 장소, 다시 반복할 수 없는 그 고유한 떨림의 경험. 대개 대자연 앞에서, 예술작품이나 종교적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경험들이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그런 떨림을 느껴봤을까?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도시에서 사는 나의 일상에는 별빛 가득한 하늘도,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산도,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바다도 없다. 심지어 미술관에 가서 예술 작품을 마주해도, 그런 경험이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진짜 아우라를 찾은 게 아니라, 복제된 아우라를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폰이 새로 나올 때마다 사전 예약을 하던 때가 있었다. 매끈한 디자인과 작은 사과 로고 하나가 내 일상을 특별하게 바꿔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같은 모델을 든 사람을 길에서 마주치는 순간, 그 특별함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여행을 떠나서도 풍경을 눈으로 보기보다 사진을 먼저 찍었다. SNS에 올리며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만,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똑같은 장소, 똑같은 사진이 끝없이 반복된다. 모두가 같은 특별함을 산다면, 그건 더 이상 특별한 게 아니다.
벤야민은 예술의 아우라가 원래 종교적 제의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동굴 벽화나 성당의 제단화 같은 것들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오직 한정된 장소와 시간에서만 볼 수 있는 신성한 경험이었다. 아우라는 바로 그 다시 반복할 수 없는 고유성에서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 종교적 의미는 옅어졌지만, 예술작품은 여전히 소수만이 향유하는 유일한 원본으로 남아 있었고, 귀족과 상류층은 그 특권을 독점했다. 하지만 사진과 영화, 인쇄술 같은 기술 복제 수단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작품의 이미지가 무한히 복제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자, 한 작품이 가진 특별한 현존감, 아우라는 점점 희미해졌다. 예술은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전시되고 소비되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발터 벤야민에게서 아우라의 상실은 단순한 문화적 퇴행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음을 뜻한다. 기술적 복제는 대상을 ‘멀리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호출 가능한 이미지로 바꿔놓는다. 기다릴 필요도, 길을 떠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즉시 눈앞에 도착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와 거리를 맺는 법, 다시 말해 경외하고 머뭇거리며 바라보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간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란 결국,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닿을 수 없고,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것. 그 긴장 속에서만 생겨나는 떨림. 하지만 복제의 시대에 우리는 세계를 ‘만나는 존재’가 아니라, ‘소비하는 주체’가 되었다. 내가 도시에서 느끼던 공허함은 어쩌면 이 지각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복제는 예술의 영역을 넘어, 삶의 감각 전체를 재편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특별함’이라는 이름의 거짓된 아우라를 끊임없이 판매한다. 광고는 “이것을 소유하면 당신은 특별해진다”고 속삭이고, SNS는 “모두가 특별한 순간을 살고 있다”는 환상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의 강렬한 장면들을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소비하며, 그것으로 삶의 감각을 대체하려 한다. 하지만 그 강렬함은 화면이 꺼지는 순간 빠르게 사라지고, 공허함만 남는다. 여행지에서도 풍경을 오래 바라보기보다 먼저 사진을 찍고, 미술관에 걸린 작품 앞에서도 그것이 유일한 원본인지 정교한 모조품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지나친다. 복제 가능한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점점 ‘지금 여기’에 머무는 법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우라의 조작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20세기 파시즘은 대규모 집회와 깃발, 영화, 상징을 동원해 군중을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다. 계산되고 정제된 연출을 통해 자신들의 이상을 설파하고 군중 심리를 조작했다. 모두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연출된 경외 속에 흡수된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다른 방식으로 똑같은 전략을 썼다. 명품, 향수, 브랜드 로고, 최신 스마트폰 디자인까지, “이것을 가지면 당신은 특별하다”는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파시즘은 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소비를 확장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의 경외감과 욕망을 조작해 온 셈이다.
내가 느끼는 공허감은 단순한 우울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과 닿아 있다는 감각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핸드폰 화면 속으로, 광고 이미지 속으로,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만 시선을 빼앗기며 정작 나의 시간, 나의 공간, 나의 관계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아우라를 경험하는 힘이란, 결국 내가 살아 있음을 되찾는 감각이다. 사진으로 남길 수 없고, 다시 반복할 수도 없는 그 순간들을 발견하는 감각. 결국 내가 원했던 건 단순한 휴식이나 새로운 자극이 아니었다. 세상과 닿아 있다는 감각, 살아 있다는 실감이었다. 사막에서 며칠을 보내고 싶다는 나의 버킷리스트도 이제 이해가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 언덕,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와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나는 아마 ‘다시 반복할 수 없는 지금’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반드시 사막으로 떠나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지는 해를 끝까지 바라보는 시간, 한 사람의 얼굴을 그저 깊게 들여다보는 순간, 온전히 음악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 찰나. 돌이켜보면, 내 안으로만 움츠러들어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동안, 나는 이토록 사소하고 특별한 순간들을 무수히 놓쳐왔다. 어쩌면 세상은 바로 그 순간마다, 여전히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을지 모른다.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골목길에서 나는 100퍼센트의 여자아이와 스쳐 지나갔다. 멀리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부터 이미 알 수 있었다.
“아, 저 애는 나에게 있어 100퍼센트의 여자아이구나.” 그녀의 모습을 알아본 순간부터 가슴은 땅울림처럼 두근거리고, 입안은 사막처럼 바짝 말라버렸다
- 하루키의 단편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