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점 하나의 넋두리
세상 사는 일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남들처럼 번듯하게 사는' 정답지를 가지고 거기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듯하다. 나도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예외가 아니지만 연애, 결혼, 집, 차, 직장... 그 어느 것도 매듭짓지 못한 채 오늘의 삶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기만 하다. 가끔은 이대로 괜찮을지 스스로에게 묻지만, 정답이 없는 질문은 바쁜 일상 속에서 무력하게 흩어진다. 요즘 1인 생활자가 늘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는데, 나도 그중 하나다. 통계 안에 찍힌 숫자 하나, 어느새 나는 '사회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
가끔은 자신에게 묻는다. 인간 관계를 넓히고, 많은 돈을 가지고, 큰 차, 큰 집을 목표로 해야만 정상인 것일까. 나는 작은 방 안에서, 더 크고 멋진 것을 바라지 않고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으며 소소하게 살아간다. 그렇다고 욕망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쫓는 건 조금 다르고, 그것조차도 쉽게 드러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내가 원하는 건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덜 불편하고 덜 거짓된 하루다. 이를테면 온전히 책 한 권에 빠져드는 오후, 혹은 집에서 조용히 내려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온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과의 작고 친밀한 관계이다. 그런 나의 미래를 꿈꾸며 사회생활의 초반까진 남들과 비슷한 ‘행복’ 코스를 걸어왔지만 어느 순간 길을 잃고 멈춰선 나를 발견했다.
프랑스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에는 집주인의 은밀한 사생활 소음이 배관을 타고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는 장면이 있다. 건물 안 세입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 리듬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지금의 우리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 욕망을 터뜨리면, 그 진동이 온 사회를 울린다. 사적인 욕망은 더 이상 사적이지 않다. 얼마나 노출하느냐가 성공의 척도가 되었고, 우리는 지하철에서, 사무실에서, TV 와 스마트폰을 통해 그들의 소음을 관음하고, 욕망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떤가. 나도 한때 사랑으로 크게 흔들린 적이 있다. 무너지고, 삶이 휘청이던 느낌은 아직도 선명하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했다'는 말이 어색하다. 드라마 대사같이 너무 거창하고 큰 의미처럼 다가온다. 철학자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말했다. 현대 사회의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포르노'가 되었다고. 기다림과 거리, 상처와 침묵이 사라진 사회. 모두가 사랑을 말하지만, 그 안에 사랑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사랑이 에로스라면, 그것은 죽음을 닮아 있어야 한다고. 사랑은 나를 흔들고, 해체하고, 때로는 파괴하는 타자의 도래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랑과 관계는 자기 계발의 연장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더 예쁘게, 더 긍정적으로, 더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랑한다. 더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어쩌면, 욕망도 사랑도 이미 타인의 시선과 알고리즘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 모른다.
일방적인 질주와 노골적인 소음 그런 것들이 나는 어색하다. 나에게 욕망이 없거나 외롭지 않은 건 아니지만, 드러내고 돈과 관심을 탐하는 날 것 같은 분위기가 싫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지금의 우리 사회는 모두가 벌거벗은 채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는 좀비의 세상이다. 벌거벗었지만 혼자만 몰랐던 동화 속 임금님, 붉은 구두를 신고 평생 춤을 추어야 했던 소녀. 지금 모두가 그런 모습으로 느껴진다. 돈과 직업과 자기충족이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존엄과 품위같은 가치들이 앞서 우리 삶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나만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통계 속 점 하나로 떨어진 나는, 좌표 한 모퉁이에 외롭게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바라본 새로운 풍경이 누군가의 길목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그 길목에서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던 세계를 다시 의심해 볼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