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벤야민 ‘이야기꾼 에세이‘를 읽고
최근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에세이’를 읽고 있다. 책에는 벤야민의 초기 단상부터 중기, 후기의 비평을 망라하는 열 세편이 담겨있다. 관통하는 사유는 '이야기꾼과 서사 예술의 종언'. 그는 이미 그가 살던 1930년대에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세대를 건너 전승되고 정제된 경험, 지혜들, 공동체를 연결하는 구전 언어들의 증발에 대한 아쉬움이다. 전쟁과 도시, 그리고 정보의 시대가 공동체와 그 기억을 파편화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도, 지금의 시대에도 다양한 문학 장르가 여전히 살아 있고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의 형식들이 도래하고 있는데, 그는 왜 ‘이야기가 사라진다’고 말했을까. 20세기 격변의 초입에 서 있던 한 지식인의 불편한 토로는 아니었을까.
벤야민은 공동체 속에서 전해지는 지혜의 언어, 즉 ‘경험의 전승’을 이야기의 본질로 보았다. 나는 그 오래전 탄식 속에서 묘한 공명을 느낀다. 오늘의 세상은 매일 갱신되는 뉴스와 알고리즘으로 움직인다. 사람들은 이야기 대신 데이터를 주고받고, 삶의 의미나 지혜보다 정보를 통한 당장의 이익과 효율을 더 중요시 한다. 그가 말한 ‘이야기의 소멸’은, 어쩌면 오늘날 ‘이야기의 상품화’로 완성된 셈이다. 서점의 진열대만 둘러보아도 이 시대가 어떤 가치들을 ‘이야기’라는 상품으로 진열해놓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정보에 노출돼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삶을 관통하는 의미를 가리키지 않고 있으며 다음 세대가 아니라 다음 해가 되면 그마저도 가치를 잃고만다. 현대의 이야기들은 디지털화되어 저장장치 안에 영구히 남게 되었지만, 우리 개개인 안에서는 가볍게 소비되어 휘발되고 그 어떤 지속성있는 의미를 남기지 못한다.
벤야민이 말한 진정한 ‘이야기’란 무엇일까? 아마도 특정한 문학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이야기는 창작이 아니라 삶의 태도였다. 경험을 가공해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 세대를 건너온 이야기를 다시 정제해 전달하는 사람, 즉 시간을 견디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야기꾼이었다. 따라서 이야기꾼은 예술가라기보다 경험이 여전히 공유될 수 있다고 믿는 증인이었을 것이다. 벤야민에게 ‘이야기’란 단순한 서사가 아니라, 세대를 건너며 경험을 전승하는 삶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근대의 전쟁과 도시, 기술은 인간의 체험을 단절시켰고, 그 단절 위에 ‘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등장했다. 그는 소설을 “고립된 개인의 고백”으로 규정했고, 그것은 그에게 공동체의 지혜를 잃은 채 자기 내부의 불안을 독백하는 서사였다. 이 지점에서 벤야민은 이야기의 시대가 끝났다고 보았다.
나는 마르께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렸다. 이 소설을 벤야민이 읽었다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여러 세대에 걸친 가족사이자, 망각과 기억, 시간의 반복을 그린 거대한 서사다. 마르께스는 이야기꾼의 언어 ― 전설, 예언, 신화, 구전의 리듬 ― 을 되살려 마콘도라는 마을을 창조했다. 그의 문장은 오래된 이야기꾼의 음성처럼, 시간을 초월한 화자의 목소리로 흐른다. 그러나 그 서술의 결과는 벤야민이 경고했던 풍경과 닮아 있다. 마콘도의 사람들은 기억을 잃고, 이야기는 전승되지 않으며, 세대들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마르께스의 세계에서 이야기의 복원은 실패한다. 그는 이야기꾼의 언어로 ‘이야기의 죽음’을 다시 기록한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이야기의 귀환이 아니라, 그 소멸의 비가(悲歌)다.
그럼에도 마르께스의 시도는 역설적으로, 이야기가 여전히 인간의 본질적 욕망임을 보여준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하고 기억이 소멸해도, 인간은 여전히 말하고자 하는 존재로 남는다. 그 말은 더 이상 지혜를 전승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상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를 기억하려는 시도가 된다. 결국 벤야민과 마르께스의 거리는 이야기의 죽음과 그 유령 사이의 거리다. 하나는 “이야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는 죽었지만, 그 죽음이 우리의 이야기다”라고 응답한다. 이제 문학은 더 이상 공동체의 기억을 잇지 않는다. 다만 상실의 체험을 전하는, 침묵의 목소리로 남는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오늘의 이야기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