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교과 선생님들도 "특수샘들은 다 천사야 천사."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물론 칭찬의 의미가 가득 담긴 애정의 표현이겠지만, 나는 그런 말들을 들을 때면 낯이 뜨거워지고,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천사라니... 나는 '천사'에 'ㅊ'도 되지 못한 사람인데 말이다.
특수교사는 천사라는 이미지가 참 무겁게 다가올 때가 있다. 괜히 그런 말을 들으면 '나' 자신이 아닌, 만들어진 천사표 특수교사에 맞는 행동을 하려고 의식하게 되는 것 같았다. 천사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학부모님이나 동료 교사들로부터 "샘, 의외네?"라는 말과 동시에 이질적인 눈빛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는지도.
아이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거나 버릇없는 행동을 할 때 나는 따끔하게 혼을 내는데, 천사표 특수교사는 오래 참음과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조곤조곤 설명해 주어야 할 것만 같다. 아침만 되면 '출근하기 싫다'는 마음이 굴뚝같이 올라오는데, 천사표 특수교사는 '아이들을 만나러 얼른 학교에 가야지.'라는 마음이 굴뚝같이 올라오지 않을까? 나는 17일 월급날만 목 빠지게 기다리면서 일과를 버텨나가는데, 천사표 특수교사는 월급은 부수적인 것이로되 숭고한 사명감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갈 것만 같았다.
사실 특수교사는 천사라는 그 말이 무거운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다. 비장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반 교사에겐 '천사'라는 말이 붙지 않는데, 장애 아이들을 가르치는 특수 교사에겐 '천사'라는 말이 붙는다. 또한 일반 교사에겐 '참 좋은 직업'이란 수식이 붙는 대신, 특수 교사에게는 '참 좋은 일', '아무나 못하는 일'이란 말이 따라온다. 이러한 수식의 기저엔 우리 아이들을 향한 동정의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어딘가 부족하고, 측은하고 불쌍하며, 어느 한 구석이 아픈 아이들이란 인식이 깊숙이 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는 특수 교사 또한 봉사의 아이콘, 천사표가 되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대하기 어렵다, 불쌍하다,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다란 인식이 어찌 보면 어느 책의 제목처럼 '선량한 차별'일지도 모른다.
특수교사에게 요구되는 사명감의 크기가 모두 다 똑같은 것도 아니고, 비슷한 형태도 아닌 것 같다. 설리번 선생님과 같은 교사가 되겠다는 사명감에서부터,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한다는 사명감, 혹은 직업적 사명감보단 개인의 자기 계발이 앞서는 사람이나 레저형 교사까지... 천차만별인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또한 현장에 있다 보면 모두가 동일한 특수교사인 집단에서도 이상한 사람(그게 나일지도...?)은 꼭 있기 마련이고, 어째 저러나 싶은 사람도 당연히 있다. 확실히 천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또한 특수교사가 불쌍한 아이들을 보듬는 직업이라 천사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불쌍한 존재도 연민의 대상도 아니다. 그저 저마다의 특성과 개성을 가진 존재이며,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그 개성을 기반으로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이다. '안됐다'라는 그 눈빛이 어떤 마음인지는 충분히 잘 알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아고 불쌍해라.', '어쩌다 이리 되어서 고생하니.'라고 말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우리가 장애를 바라보아야 하는 인식은 차별이나 혐오를 지나, 동정과 연민도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동등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칭찬으로 건네는 그 말에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그냥 덮어두기엔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여러 번 생각하고 내린 결론도 동일했다. 장애가 있기 때문에 불쌍한 존재도 아니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해서 천사표도 아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그저 또래의 다양한 아이들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존재일 뿐이고, 특수교사 역시 다양한 학교나 교과의 교사들 속에 있는 한 분야의 교사일 뿐이다. 모두가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