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지만 아기입니다

by 쫑알이

회사를 다니면서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만큼 집에서의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는 다양한 직책과 역할이 생겼다. 특히 내가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는 직원, 선임, 후임 등 수많은 관계 속에서 수많은 직책과 역할들이 소리소문 없이 내게 부여되었다. 그리고 회사 밖에서는 누군가의 선배, 누군가의 친구, 심지어 누군가의 선생님까지 나는 서서히 이런 부담되는 이름들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내가 가장 오래 가져온 내 역할을. 우리 할머니의 똥강아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직책과 역할 중 제일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인데 내가 왜 잊고 있었을까?


오늘 설 기념으로 할머니댁에 방문해 신난 나머지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장어와 아이스크림을 배 터지게 먹었다. 안타깝게도 내 소화기관들은 내 흥과 욕심을 받아줄 정도로 자비로운 아이들이 아니었고 더 안타깝게도 오늘은 이후에 카페도 가고 납골당도 가야 하는 등 일정이 더 있었다.


나는 밖에서의 내 직책과 역할에 맞게 굳이 아픈 것을 티 내지 않고 숨겼다. 선생님, 선배, 친구로서 매일 그랬으니까. 그런데 계속되는 차멀미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는 차에서 냅다 울어버렸다.


예상치 못했던 나의 울음에 당황한 우리 가족들은 나를 데리고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내 손을 따주며 한의원에서 받아온 침을 놔주었고 소화제를 잔뜩 꺼내주었고 갖고 있던 핫팩을 손에도 쥐어주고 배에도 붙여주었다. 그리고 내 울음을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닦아주었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이렇게 다른 사람 앞에서 울어본 게 얼마만이고 이렇게 다른 사람이 내 눈물을 닦아줬던 게 얼마만인가?


할머니의 침에 아프다고 찡찡대는 나에게 할머니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애기라며 놀리셨다. 나는 싫지 않았다. 내가 애기인 게 좋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 눈에는 애기였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가져온 내 이름을 잊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어른스러운 척 한들 이는 변하지 않는다. 아직 할머니한테는 애기이다. 이 사실이 참 감사하고 안심이 된다.


할머니, 나 할머니 앞에서는 항상 애기할래. 나 내 감정 안 숨기고 나 힘들면 그냥 울어버리고 찡찡댈래. 나 애기라고 불러주는 사람 할머니밖에 없으니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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