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던 날

by 빛담

어젯밤부터 세차게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 자고 일어났더니 온 세상이 하얀 월드가 되어 있었다.

직장인이라면 사실 눈이 오거나 말거나, 직장에는 가야 할 터,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면도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늘 입던 옷을 입고, 평소 자주 들고 다니는 캉골 에코백(나름 2만 원이나 주고산 내 최고의 명품 백이다)을 들고 집을 나서던 중, 문득 '카메라'가 마음에 걸렸다.


[내 마음속 여당과 야당]

(여당) '눈 오는 날을 예쁘게 담아보고 싶은데 카메라 가져갈까 빛담?'

(야당) '귀찮게 뭐 하러 가져가, 보안 데스크 가서 봉인했다가 다시 들어갈 때 꽁꽁 싸매야 하는데

(여당) '그래도 괜찮아, 보안 규정 지키면 되지. 분명 빛담, 오늘은 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담을 수 있을 거야'


오늘도, 내 마음속 여당야당은 언제나 티격태격이다. 그래, 오늘은 여당의 승리야. 나는 문밖을 나가기 전, 요새 새로 구입한, 필름룩 작품을 만들어주는 '마법 카메라'를 가방에 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웬걸, 점심 먹을 즈음에는 그칠 걸로 예상한 함박눈이 낮까지도 하늘에서 무섭게 떨어지는 중이었다.

퇴근했다면, 다시 회사로 돌아온 생각이 없었다면, 우산을 쓰고라도 눈을 맞으며 사진기와 동행할 의지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직 일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남았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오후쯤, 잠깐 눈이 그치는 듯해 보였다. 사무실 안에서 하늘이 맑아지고 눈이 안 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카메라를 들고 회사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번엔 필자의 신발이 문제였다. 평소 닮고 달 정도로 애용하는 내 신발이, 굽이 낮고 생활방수가 되지 않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에, 신발이 젖지 않게 부분 부분 녹아내린 살얼음길을 피해 가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올해 첫눈온 날,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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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주변, 평소 보던 것과 다른 색감이 너무나도 나를 흥분 시켰다.


거리에는 마침 인근 중학생들의 하교를 맞아 도보가 북적북적했다. 나는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홀로 신발 젖을까 봐, 혹시나 카메라를 떨어뜨릴까 두려워하며 마치 일본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 마냥 좁은 보폭으로 사뿐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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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던날의 풍경들


그렇게, 회사 주변을 돌아 짧게나마 나는 '일탈'을 할 수가 있었다. 오래 찍고 싶었지만, 아쉽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예전 에피소드에서도 이야기했듯, 사진 찍는 친구 가 함께 있었으면, 분명 오늘 퇴근 후 이태원이든 종로든 가자고 했을 텐데... 이 부분은 사실 여전히 아쉽기는 하다. 사진도 함께 찍으면 두 배 아니 세배로 즐거운 법이거늘. 사진 친구의 부재는 늘 언제나 아쉽다.


어느새 나의 발걸음은 다시 회사로 향해 있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옷매무새나 모습을 점검한 뒤, 내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빛담) 사진 어때요? 바깥에 나가서 잠깐 찍어왔어요

(동료 1) 오, 선배, 오늘 카메라 가져왔어요? 이건 완전 필카아녀요?

(동료 2) 오, 대박, 수평수직 진짜 잘 맞춘다.

(동료 3)와, 느낌 있다.


사무실에 돌아와 잠깐의 여유시간이 생겨 내가 찍은 사진을 품평해 달라고 메신저로 보내보았다. 사실 품평이 아니지, 엄밀히 말하자면 '자랑' 비슷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우리 착한 동료분들은 내 이런 자랑도 의례 아주 잘 받아 주신다.(사실 받아주실 만한 분들에게만 사진 품평을 부탁하는 편이다. 필자가 소심한 편이라)


나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보기로 하였다. 바로 사내 익명게시판에 내 사진을 올려보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 더욱더, 사내 익명게시판이라는 곳이 좀 글을 올리기 민감한 게시판이 된 거 같아 내가 이런 사진을 올려도 될지에 대한 불안감도 작게나마 엄습해 왔다.


'00층에서 큰 소동이 난 거 같은데, 무슨 일 있나요?'

'00님, 제발 좀 씻고 다니세요.'

'제발 손톱은 집에서 깎으세요'

등등, 요 근래 사내 익명게시판에는 건설적인 이야기들 보다는 누가 누가 가장 불편한 사연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경연의 장을 펼치는 곳이 된 거 같아 아쉬운 생각뿐이었다.


"내 사진을 사내 익명게시판에 올린다고 누가 좋아나 할까...?" 하는 생각과 나의 작성글이, 앞서 언급한 게시판 자체 성격에 맞지 않을 거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동시에,

"사람은, 자기가 늘 보던 풍경을, 누군가가 다른 시선으로 담아주는 것을 좋아해"라는 평소 생각을 갖고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한번 올려보았다.


'첫눈이 왔네요. 잠깐이나마 바깥에 나가 눈 오는 날의 풍경을 담아보았습니다. 남은 시간 어느 누구도 찾는 사람 없이 평온한 하루 보내세요!'

라는 짧은 말과 함께, 앞서 나가서 찍은 눈 오던 날, 회사 주변 풍경을 올렸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호의적 댓글들과 하트들이 내 게시글에 더해지기 시작했다.

(댓글 1)와, 무슨 앱으로 찍으신 거예요? 느낌 너무 좋다

(댓글 2) 필름 현상이 이렇게 금방 되나요?

(댓글 3) 눈 오는 날의 풍경을 정말 잘 담아주셨네요. 잠시나마 좋은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뭐야, 다들 이렇게 좋은 댓글들을 쓰는 사람이면서, 왜 다른 게시글들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댓글들을 썼는지 잘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많은 댓글들과 반응들을 체감하며, 사우들이 내가 올린 콘텐츠를 통해 '잠시나마 평온해질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는 점에 더해 그들이 내 콘텐츠에 '잠시나마 시선을 보관해 주었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오늘 하루를 마음껏 즐거워해도 되는 동력이 된 거 같다.


모쪼록, 오늘 하루가 나에게도 좋았던 하루였듯, 당신에게도 즐거웠던 하루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