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호든 과보호든
"뜬금없긴 한데 빛담프로 우리 큰애 농구 프로그램 강사가 J라고 하네?"
같이 일하는 매니저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내용은 그분의 말 대로 다소 뜬금없었다.
아들이 농구교실을 다닌다고 저번 식사 때 매니저께서 이야기해 주셨던 부분이 생각났다. 평소 농구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분께 누가 강사하고 있는지 시간 되면 알려달라고 했다. 매니저님은 오늘 그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나셨었나 보다.
"아, 그 선수요. 알지요. 2년 전에 은퇴를 한 걸로 알아요"
"왜 은퇴를 한 거야?"
"그게... 키도 작고 슛도 없고 특색이 별로 없어서요^^;"
나는 내가 아는 그 선수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매니저의 아들의 농구 강사는 아무리 내가 안 좋게 이야기한다고 안 변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긍정적인 이야기들도 함께 곁들이며 일과 관련 없는 스몰토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 강사분 선수시절에 리더십은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지? 그런 거 같더라고 애들 잘 잡고 착실히 가르치는 거 같던데 흐흐"
사회생활을 하려면 때로는 진실보다 다른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줄 때도 있어야 한다. 매니저님은 빠르게 타이핑을 이어가며 아들의 농구 교실 얘기를 나에게 해주고 있었다.
"근데 이젠 농구도 돈을 주고 배워야 하는 게 말이 되나?"
"그러게요. 얼마씩 주고 하세요?"
"그렇게 비싸지는 않은데 싸지도 않아. 어릴 땐 그냥 공들고 나가서 빈 운동장에서 애들하고 다 같이 공놀이하곤 했었는데 말이지"
"그러게요. 피엠님 아드님도 그렇게 시키시면 되지 않나요?"
"그게, 애들이 흙바닥에서 운동하다 다칠 것도 같고 나쁜 사람 만날까 봐 걱정도 되고 그래서 말이지"
그 말을 듣고 나는 머리가 잠시 멍 해지는 것을 느꼈다.
필자도 분명 어릴 적에 혼자 운동장에 공을 들고 가 농구를 하던 생각이 났다. 하지만 요새 어린 친구들은 농구도 돈을 내고 배워야 하는구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배우는 게 아닌 거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어른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보니 필자가 살던 서울 강북권 학군은 그다지 좋은 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와 그 당시 우리는 저런 교육의 혜택을 받고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지역은 안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당시 나는 농구와 같은 구기종목을 돈 주고 배운다는 생각은 해보질 못했었다.
아, 하나의 예가 있긴 있었다. 차범근 축구교실. 우리 때 아주 유명했던 강습 프로그램이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교실 다닌다는 친구 하나가 공찰 시간만 되면 혼자 드리블하고 패스를 안 해 어찌나 꼴불견이던지. 하지만 그 친구는 생활체육개념의 축구를 지향하던 경우가 아닌 축구 엘리트를 지망하던 친구였었다.
즉, 구기종목 선수를 지망하는 학생들에 한정된 입시 학원의 개념이지. 지금처럼 키가 작아서, 사교성이 부족해서, 운동을 하나 배워야 남들이 안 괴롭힌다고 해서 등의 이유로 학원을 보내는 일은 기억에 없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태권도는 예외다.)
아울러 무언가를 배우거나 노는 데 있어 이제는 부모가 느끼기에 '안전'이라는 요소가 엄청나게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다. 앞서 매니저와의 대화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요새 부모는 아이들을 끔찍이 아낀다. 우리 아이가 흙바닥에서 운동하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는 경우는 참을 수가 없나 보다.
근데 분명 필자 어릴 때는 흙바닥에서 공을 가지고 친구들과 원 없이 놀았던 경험이 많다. 그때는 잘 닦여있는 농구코트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흙바닥에서 농구를 하다 무릎이 까져도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게 너무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교우관계다. 요새 아이들의 교우관계에 부모가 개입하는 경우가 정말 흔해졌다고 느끼고 있다. 필자 어린 시절 본인 스스로 친구네 집에 연락을 돌려 약속을 잡거나, 놀이터에 가서 친구를 직접 만드는 일이 흔했었다. 그 사이에 어른들의 개입은 없었다.
요새는 저런 말하면 "세상이 바뀌었는데 어른이 되어갖고 무슨 말을 하세요?"와 같은 이야기를 듣기 딱 좋은 말이 되었다. 그리하여 요새는 어떻게든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아이들 당사자가 아닌 '부모'들이 더 바쁘다. 필자의 와이프는 사십이 넘은 지금에도 자녀 친구 엄마들 때문에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나는 매니저의 아들에 대해 꽤 많이 안다. 왜냐하면 매니저가 그동안 이것저것 타인들과 나에게 그들의 교육방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초6이지만 이미 중3까지 선행을 완료했다는 이야기, 사모님께서 아들을 좋은 대학 보내기 위해 수많은 격려(?)와 따뜻한 조언을 해주신다며 그럴 때 괴로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본인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아들에게 대학 갈 때까지만 무조건 참으라는 말을 평소 아이에게 자주 해 주신다는 이야기들 까지. 얼핏 들어보면 스카이 캐슬 보급형의 느낌도 살짝 난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아이의 생각은 어떤지도 궁금하다. 물질적으로는 분명 만족하고 살 텐데, 과연 그게 '본인'의 인생일까? 하는 생각 말이다.
'과연, 그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과연, 그 아이는 농구가 정말 본인이 좋아서 하는 걸까? 부모가 키가 작으니 그저 등 떠민 경우는 아닐까?'
'과연, 그 아이는 부모가 쳐주는 실드 안에서만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할까?'
라는 구체적인 궁금증 말이다.
필자의 경험상, 어릴 적 부모님 두 분이 생업에 종사하시느라 안 계셨지만 나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흙바닥에서 농구를 했지만 여러 농구 대회도 나가 팀의 좋은 성적에 기여도 했고, 비록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지만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부모님이 어릴 적 자주 안 계셨었기 때문에 홀로 책을 많이 읽거나 친구들과 뛰어노느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더 잘 기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리 부모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많은 용돈을 내게 주시지 않았기에 스스로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야만 했었다. 멋모르고 철없던 예전엔 이런 집안 사정을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었으나 지금은 앞으로 펼쳐질 힘든 삶의 '면역 주사'를 부모님께서 놔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새 부모들은 우리 부모들보다 돈이 더 많은 세대 같다. 아낌없이 자녀를 위해 많은 것을 쏟아붓는다. 아이들이 예전보다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부모의 투자로 인해, 그들이 보다 많은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아이들이 적어도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에 대한 학원 등원도 '아이'스스로 요청을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만 본인이 내린 결정이라며 조금 더 애착을 갖고 등원하지 않겠는가.
아마 오프라인에서 이러한 교육관을 갖고 토론했으면 서로 얼굴 붉히고 사이가 안 좋아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필자의 브런치니까, 필자 마음 가는 대로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을 글로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