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지 않아서 다행이었던 네 번째 날
오늘은 아침에 조금 늦잠을 잤다. 여행 일정상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에, 느긋하게 숙소를 옮기면 되었다.
생각해보면, 첫날엔 열쇠함을 찾지 못해 괜히 신경이 곤두섰고, 욕실과 세면대가 하나뿐이라 조금 불편했지만, 막상 떠날 때가 되니 나름 괜찮았던 숙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행을 오면 캐리어에서 꼭 필요한 것만 꺼내는 편이라 짐을 싸고 푸는 데 크게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금세 체크아웃 준비를 마치고, 3일 동안 내 몸을 눕혀주던 침대에 작게 인사를 건넸다. 에어비앤비 주인장에게 메신져로 “건승하시길 바랍니다”라는 짧은 덕담을 남기고, 지하철을 타고 약 10분 거리의 다음 숙소 근처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려 구글맵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20분쯤 걸었을까. 1km가 넘는 거리를 무거운 캐리어를 끌며 이동한 끝에, 두 번째 숙소에 도착했다. 주인장은 환하게 웃으며 짐을 맡아두겠다고 했다. 아침에 분명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숙소에 다다를 즈음에는 온몸이 땀에 젖어버렸다. 그로인해 찝찝한 기분으로, 오늘의 여행을 시작할수 밖에 없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교토에서 약 130km 떨어진 효고현 히메지.
히메지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지만, 처음엔 딱히 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5일간의 JR 패스를 써야 한다는 ‘아까움’이 나를 움직였다. 돌아오는 길엔 고베 하버랜드도 들러볼 생각이었다. 예전 여행 때는 공사 중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조역에서 교토역까지는 한산했지만, 교토역 플랫폼에 내려서자마자 사람의 파도에 압도됐다. 특히 서양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서양도 지금 연휴인가?” 싶은 광경이었다. 일본인들이 줄을 서서 ‘관광객이 너무 많다’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도 들렸다. 그 말이 왠지 뼈에 와 닿았다.
교토는 지금 ‘오버투어리즘’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2026년부터는 숙박세를 더 높여 걷는다고 한다. 그 세금으로 현지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지탱할 수 있길 바라본다. 그리고 문득, 지나가는 서양 관광객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일본 다음엔 한국에도 가시나요?”
한국도, 참 볼 게 많은 나라인데 말이다. 기회가 되면 한국을 널리 알리는 전도사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곤 한다.
신쾌속 열차 안에서 20분쯤 서 있다가, 오사카를 지나면서 조금씩 자리가 비기 시작했다. 히메지까지는 약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빈자리를 찾아 앉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히메지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배고픔이었다.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 나지만, 여행 중엔 연료를 채워 넣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 역 근처에서 일본의 저렴한 덮밥 체인점을 발견했다.
비대면 주문기를 이용해 ‘오야코동(親子丼)’과 ‘진한 녹차라떼’를 주문했다. 대면 주문을 피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의 권유나 빠른 말에 속아 원치 않는 걸 사버릴까 봐서다.
덮밥을 기다리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오야코동…親(부모)과 子(자식)… 부모자식 덮밥?’
검색해보니, 닭고기와 계란 덮밥을 뜻했다. 닭과 달걀이 부모와 자식이라니, 생각보다 잔인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계란 입장에서 진짜 자기 부모와 함께 덮밥이 될 확률은… 없겠지? 괜히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밥을 마저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히메지성으로 향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도착하자마자 구름이 걷히며 청명한 하늘이 열렸다. 일본 특유의 ‘달라달라한 하늘’, 그 맑고 투명한 색감이었다. 교토나 오카야마에서는 보여주지 않더니, 이제야 나타났다. 그래도 반가웠다. “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 그렇게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다만, 맑은 하늘엔 함정이 있었다. 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였다. 한국의 10월은 선선하지만, 일본의 10월은 반팔로도 거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면 금세 추워지는 변덕스러운 날씨 — 일본인들이 이 기후에 익숙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히메지성 입장권은 인근의 고코엔(好古園) 정원 관람권이 포함되어 1,050엔이었다. 줄을 서서 10분쯤 기다린 끝에 성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근처 자판기에는 ‘관람에는 1시간 이상이 소요되니, 미리 물을 사두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말이 나올 정도로 더웠다. 결국 시원한 물 한 병을 사 들고 관람을 시작했다.
히메지성은 전국시대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성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관련이 있다. 역사적 맥락은 몰라도, 풍경 하나만큼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흰 성벽이 유난히 눈부셨다.
관람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천수각’이라 불리는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계단이 다섯 번 이상 이어졌고, 경사가 급했다. “다음에 또 오면 굳이 천수각까진 안 올라가도 되겠다.” 싶었지만, 한 번쯤은 오를 만한 곳이었다.
천수각 안에서 만난 중학생 무리가 인상 깊었다. 알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평일이라고 착각한 나는 그저 교복 입은 아이들이 견학을 온 줄 알았다. 계단이 좁아 서로 양보하며 내려가던 중, 내가 먼저 길을 터주자 아이들이 밝게 눈인사를 했다. 겉보기엔 사춘기 냄새 물씬 나는 무리였지만, 낯선 이에게도 예의를 잃지 않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성 밖으로 나서자, 그들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헬로~ 헬로~”를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 천진난만한 인사에, 사람들은 저마다 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오늘의 하늘과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를 내 오감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교토에서 두 시간을 달려온 히메지성. 충분히 올 만한 곳이었다.
히메지성 관람을 마친 뒤엔 인근의 고코엔 정원으로 향했다.
나무 그늘이 많아 시원했고, 정원 곳곳엔 다다미 형태의 쉼터가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은은한 흙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사람은 많았지만, 정원은 고요했다. 잠시 벤치에 앉아, 여행 중의 나를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정원을 나와 역으로 향하는 길, 미유키 상점가를 지나쳤다.
우리나라의 전통시장과 비슷한 거리로, 실내라 그런지 덥지 않았고, 곳곳에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거리 한쪽에서는 이름 모를 연주자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소리 덕분에, 평범한 귀가 길이 잠시 축제처럼 느껴졌다.
히메지와의 작별을 뒤로하고 다시 신쾌속 열차에 몸을 실었다. 원래는 고베 산노미야역에서 내릴 예정이었지만, 깜빡 잠이 들었다. 무거운 짐과 더위, 그리고 하루의 여정이 몸을 녹초로 만든 탓이었다.
두 번째 숙소에 도착하니 주인장이 친절히 맞이했다.
“ゆっくり休んでください(천천히 쉬세요).”
이번 숙소는 일본 전통 다다미방이었다. 나는 원래 침대보다 바닥 이불에서 자는 걸 좋아한다. 다만 욕실과 거실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일본의 감성이 묻어나는 다다미방의 공기만큼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잠시만 교토’ 여정의 4일째 밤이 저물었다.
아직도 남은 날이 많다.
서두르지 말자.
사진만 찍으려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 더 느끼고, 조금 더 머물며,
이 여행의 온도를 천천히 내 몸에 새겨가자.
라며, 스스로에게 혼잣말을 이어 갔다.
完璧じゃなくていい。ただ、今日を丁寧に生きれば。"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오늘을 정성스럽게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