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패스가 끝나고, 여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끝이 알려주는 시작

by 빛담

오늘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8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정해진 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동안은 간사이 와이드 패스로 ‘가야만 하는’ 곳들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내가 스스로 정해야 했다. 물론 지난 일정도 내가 짠 것이지만, 그때는 ‘패스 값 이상은 뽑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먼 곳 위주로 계획을 세웠다면, 이제는 조금 다르다. 숙소에서 30분 이내로 이동할 수 있는, 가볍고 여유로운 코스를 원했다. 그렇게 오늘의 목적지는 아라시야마 치쿠린(대나무 숲)과 금각사로 정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의 여행은 내 인생과도 닮아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졸업, 군대 전역까지 내 인생은 늘 ‘정해진 길’ 위에 있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주어진 일정대로 살아가면 됐다. 하지만 군 전역 이후 처음으로, ‘아침에 나를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엔 너무 좋았다. 자유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은 한가함도 오래가지 않았다.

여행도 마찬가지다.숙소에서 빈둥거리며 쉬는 것도 여행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여행은 ‘귀한 시간 동안 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새로운 풍경과 순간들을 담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숙소 문을 나섰다.


일본의 유명 관광지에는 어딜 가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다.
심지어 히메지성을 갔던 4일차, 일요일이었음에도 교복 차림의 학생들을 여럿 봤다. 이유를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멀리서 바라본 그 장면은 분명해 보였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문화유산의 의미를 설명하고, 아이들은 흥미롭게 그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스럽게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품게 되지 않을까.

반면, 초등학생 딸 둘을 키우는 아빠로서,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국에서 학교 단체로 경복궁이나 인사동 같은 전통문화 공간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나 역시 학생 시절, 그런 경험은 손에 꼽는다.
일본에서는 여성들이 기모노를 입고 거리를 거니는 게 자연스럽지만, 한국에서 한복은 여전히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으로 여겨진다. 분명히 입기에 불편하다는 점은 비슷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여행객의 입장에서 일본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부러울 때가 많다. 우리에게도 자랑스러운 문화 자원이 많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올해 2월, 교토의 대표 관광지인 아라시야마까지 운행하는 1량짜리 트램이 새로 생겼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숙소 근처에서 조금만 걸으면 이 트램을 타고 바로 아라시야마까지 갈 수 있었다. 아라시야마 인근엔 이미 두 개의 지하철 노선이 있지만, 트램을 추가로 개통해 시내 접근성을 높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교토의 구석구석을 더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탑승했던 키타노하쿠바이초역에서 약 30분 후, 란덴열차라고 불리우는 이 트램은 종점인 아라시야마에 도착했다.

트램에 내려서 조금만 걸으면 ‘도게츠교(渡月橋)’라는 다리가 나온다. 이곳은 며칠 전 방문했던 우지교와 묘하게 닮아 기시감이 들 정도였다. 강폭은 넓지 않고, 주변은 개발되지 않아 자연스러운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맑은 물과 고요한 산, 그리고 그 풍경을 감상하며 강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 모든 풍경이 마치 ‘우지의 또 다른 얼굴’ 같았다.

도게츠교에서 아라시야마 치쿠린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거리다.

하지만 평일임에도 사람이 너무 많아, 발걸음을 제대로 옮기기 힘들 정도였다. 단체 관광객들의 무리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초가을 교토의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치쿠린은 사람이 정말 많았다. 대나무 사이로 이어진 길은 좁고, 인파는 끝이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다다르자, 갑자기 고요가 찾아왔다.
단체 관광객들이 돌아간 뒤, 비로소 ‘아라시야마의 본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카메라를 들어 내가 담고 싶던 장면들을 하나씩 담았다. 시간이 된다면, 나는 아라시야마 치쿠린만 보고 돌아서지 말고 주변을 천천히 산책하시길 권하고 싶다. 아마 커피 한 잔을 곁들이며 걷다 보면, 두세 시간은 금세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걷다 보니 목이 말랐다. 마침 눈에 들어온 ‘아리 커피(ARI COFFEE)’라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일본어로 적혀 있는 메뉴판을 살피다 맨 위에 적힌 “브란도 커피(ブランコーヒー)”를 주문했다. 이 커피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쓰여 있어 읽어보려 했지만 아주 정확하게는 알수는 없었다. 그저 가장 앞에 적혀 있으니 이 집의 대표 메뉴겠거니 싶었다. 잠시 후, 바리스타는 낯선 기구와 타이머, 빈 잔을 가져왔다.

“3분이 지나면 이 레버를 눌러 커피를 추출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는데, 약간의 산미 속에 깊은 향이 느껴졌다. 마치 예전에 강릉에서 마셨던 ‘박이추 커피’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아껴 마시려 했지만, 결국 금세 다 마셔버렸다.

카페를 나와서도 한참 동안 ‘브란도 커피’의 향이 입안에 남아 있었다.


일본의 관광지를 걷다 보면, 인력거꾼들을 자주 보게 된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구릿빛 피부에 탄탄한 체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삶이 녹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들이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부러웠던 건, 일본의 주차 문화였다. 우리나라보다 도로는 좁지만, 일본에서는 불법 주차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차를 사려면 ‘차고지 증명서’를 제출해야만 번호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도로에는 자동차와 자전거, 인력거, 보행자가 함께 어울린다. 불법 주정차가 없으니 보행자 입장에서도 시야가 막히지 않고, 길을 걷는 일조차 쾌적하다. 한국에서도 이런 문화가 자리 잡았더라면, 도심 속 이동의 풍경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라시야마를 둘러본 뒤, 다시 트램에 올라 금각사로 향했다. 종착역인 키타노하쿠바이초보다 두 정거장 앞인 료안지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했다. 가는 길, 배가 고팠다.

마침 보인 덮밥 체인 ‘나카우(なか卯)’ 옆에 “가라아게 정식 1,100엔”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점심시간이라 가게는 한산했다.(鳥舎のんき) 자리에 앉아 메뉴를 살피니 ‘타베호다이(食べ放題)’라는 문구가 보였다. ‘무제한’이라는 뜻이다. 내가 음식을 거의다 비워갈 때 쯤, 점원이 다가와 “더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가라아게 세 조각과 밥을 조금만 더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가져다주며 “일본어 공부하시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JLPT 2급은 있지만 회화는 잘 못해요.”라고 답했다. 그는 “아니에요, 충분히 잘하세요.”라며 칭찬을 건넸다.

맛있게 먹은 데다 일본어로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더 기분좋아지려고 맥주 한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밥과 맥주, 그리고 친절한 대화가 어우러진 점심이었다.
나는 계산하며 “정말 맛있었어요, 덕분에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하자, 그는 “즐거운 여행 되세요.”라며 미소로 답했다. 든든한 식사와 시원한 맥주 덕분에 피로가 조금 풀렸다.


점심을 먹은 뒤, 10분쯤 마저 걸어 금각사 입구에 도착하자,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는 안내가 있었다. 요즘 일본에서도 현금만 받는 곳은 드문데, 금각사가 그랬다. 입장권은 부적처럼 생긴 종이였다. 버리기 아까워서, 아마 한국에 돌아가서도 지갑에 넣고 다닐 것 같다. 정말 예쁜 입장권이다.

금각사는 약 20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히메지성이나 아라시야마처럼 오래 머무를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림처럼 빛나는 금색 누각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유명하니까 한 번쯤은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왔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만족스러웠다.


교토의 10월은 여전히 여름 같다. 일본 사람들은 이렇게 더운데도 긴팔에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나는 카메라 가방과 여권 가방을 맨 어깨 부분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민망할 때가 많다. 그런 나와 달리, 일본 사람들은 땀을 거의 흘리지 않는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총 11일 일정이라 28인치 캐리어를 가져왔지만, 벌써 절반이 지난 오늘, 여름 날씨 탓에 옷이 바닥나 버렸다. 여행 중 빨래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은 길어봐야 4~5일 일정이라 세탁할 일이 없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어제 숙소 주인에게 200엔을 내고 세탁을 맡긴 뒤, 야외에 직접 널었다.

그런데 막상 널고 보니 ‘건조기’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속옷과 얇은 반팔 정도는 건조기로 금세 끝났을 텐데, 하나하나 손으로 널어 말려야 했다.

숙소로 돌아와 마른 옷들을 하나씩 걷어 담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남은 일정 동안은 빨래 걱정 없겠다.” 땀에 절은 하루였지만, 깨끗하게 마른 옷을 보니 괜히 마음이 개운했다.

日常の中に、静かな幸せがある。"일상 속에, 조용한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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