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예의, 그리고 나의 여정

by 빛담

벌써 두 번째 숙소의 마지막 날이다.

이곳은 참 좋았다. 야외 정원은 언제나 즐거웠고, 다소 지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오며 가며 인사하던 외국인 여행자들을 보며 ‘나만 혼자 교토에 와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 번째 숙소로 옮겨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 밤, 숙소 공용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름다운 세계 여행』이라는 책을 펼쳤다. 사실 세계 여행이라는 책 답게 많은 나라들에 대한 여행기가 있었으나, 그중 내가 보기 편한 ‘한국편’을 읽으며, 낯선 이 교토라는 도시에서의 여유와 낭만을 조금 더 만끽했다.
아침이 밝자, 나는 어느새 능숙하게 짐을 싸고 좁은 계단을 따라 캐리어를 내렸다. 늘 마시던 오이오 녹차 티백에 따뜻한 물을 붓고 한 모금 마신 뒤, 집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집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 덕분에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두 번째 숙소에서의 여정은 마무리되었다.


세 번째 숙소까지의 교통편은 애매했다. 버스나 지하철로 한 번에 갈 수 있긴 했지만, 그 사이를 잇는 도보 구간이 20분 가까이 됐다. 왕복이라면 거의 40분.
이번만큼은 교통비를 조금 더 쓰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엔 돈을 쓰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시간을 써라.” 나는 이말이 이상하게 뇌리에 박혀있었다.
첫 번째 숙소에서 두 번째 숙소로 이동할 때, 나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체력’을 바닥에 쏟아부었던 기억이 있다. 그날의 피로를 떠올리며, 이번엔 조금 현명해지고 싶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약 30분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세 번째 숙소에 도착했다. 나를 맞이한 사람은 젊은 여성으로, 나중에 이름을 들으니 ‘사쿠라상’이라 했다. 능숙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는 그녀 덕분에, 나는 긴장이 풀린 채 카메라와 여권가방만 챙겨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내가 보고 싶던 가모강까지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이번엔 ‘좋은 방향의 오차’였다. 첫 두 숙소와 달리, 이번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모강은 초가을 햇살에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거나, 조깅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문득 결심했다. “그래, 한국에서 가져온 러닝화를 신어볼 때가 됐지.”

산책을 마친 뒤, 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점원은 자연스럽게 창가석으로 안내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나는 비로소 ‘가모강의 여유’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오늘 일정을 정리했다. 문득 영화관에 가고 싶었다. 애니메이션이 아닌, 일본 멜로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었다. 검색해보니 ‘무비X 교토’라는 영화관이 도보 15분 거리였다.
그런데 풍경은 여유로워도, 내 머릿속은 여전히 분주했다. 귀국 비행편이 생각난 것이다.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발 비행기 출발은, 10월 12일 16시. 이미 며칠 남지 않았다. 나는 교토에서 공항까지 이동하는 하루카 열차 직통편을 찾아 12시 50분 도착 열차를 예매했다.
“이제 진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구나.”
아직 여정은 비교적 많이 남았지만, 마음 한켠이 묘하게 쓸쓸해졌다.


영화관으로 향하는 길, 한 손엔 카메라를, 다른 손엔 구글맵을 들었다. 길은 단순했다. ‘직진.’
가는 길 곳곳에는 중고서점들이 보였다. 나는 문득 생각났다. 이번엔 일본어로 된 책 한 권쯤 사보자.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서점에 들어가는 건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일본의 점원들은 진심으로 친절하기에, 구매하지 않고 나올 때마다 미안함이 남는다. 그래서 나는 멀찍이서 망원렌즈로 상점가를 담곤 한다.

그러다 바깥에 책이 진열된 서점을 발견했다. 한 권에 100엔. 믿기 어려운 가격이었다. 나는 5분 정도 책을 훑어보다, 흥미가 생긴 한 권을 골랐다. 히키코모리에 관한 책.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일본 사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저자의 시선을 통해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원래 소설보단 사회적 주제를 다룬 책을 좋아한다. 상상보다 ‘현실’을 더 잘 그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내가 끝까지 읽을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카모강 카페에서 부터 약 30분쯤 걸려 도착한 영화관의 첫 인상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영화 편성표를 손으로 볼 수 있도록 비치해둔다는 점이었다. 주말과 다음 주 상영작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보고 싶던 ‘도쿄 택시(키무라 타쿠야 주연)’는 아직 개봉 전이었다. 결국 한국에서 개봉했던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기로 했다. 자막은 일본어였다. 음성은 한국어 그대로.

영화가 시작되자, 자막의 번역이 다소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가 사라진 대목들이 곳곳에 있었다. 일본 관객들은 과연 어떤 감정으로 이 영화를 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상 깊은 점 하나.

일본의 관객들은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유도등도 켜지지 않았다. 나도 덩달아 마지막 글자가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나중에 사쿠라상이 말해줬다.
“일본에서는 크레딧까지 보는 게 영화에 대한 예의래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우리도 영화를 사랑하지만,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구나.

영화를 보고 나오니 와이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여보, 아이들 기념품 뭐 좀 사올 거 있어?”
“큰애가 일본 과자 많이 사다 달래.”
“그거 말고 또?”
“연필깎이 하나 필요하대.”

마침 근처에 문구점이 있었다. 나는 연필깎이 코너에서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냈고, 아내는 마음에 든다고 했다.
문득 생각했다.
이 여행이 가능했던 건 아내 덕분이다. 아이 둘을 혼자 돌보면서도, 내가 이 11일간의 여정을 온전히 경험하도록 허락해준 사람. 그래서일까, 상점가를 걸을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꾸 떠올랐다. 예쁜 물건을 볼 때마다 ‘저건 와이프가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필깎이를 사고 난 뒤, 테라마치 상점가를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규쿄토’라는 상점을 발견했다. 외관이 너무 아름다워 저절로 발길이 향했다. 문을 열자 향기가 먼저 나를 맞았다. 상가집의 향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오히려 마음이 맑아지는 냄새였다. 더운 초가을의 공기와 땀냄새를 덮어줄 만큼 포근했다.
규쿄토는 마치 작은 박물관 같았다. 입장료 100엔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는 너무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결국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사지도 않으면서…’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담아두고 싶었다.

테라마치 상점가 끝자락에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한정판 그림을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슬램덩크, 드래곤볼, 지브리까지. 사진 촬영도 자유로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테라마치 상점가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니시키 시장’으로 이어진다.
테라마치가 주로 일본 잡화 위주라면, 니시키는 식자재의 천국이었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현지 아주머니들, 젊은 여행객들, 그리고 나 같은 혼자 여행자들이 섞여 있었다.
나는 처음엔 구경만 하려 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온 문구 하나.

‘100엔 사케.’
“이걸 그냥 지나치라고?” 그럴 리가.
100엔짜리 동전을 건네자, 마스터가 바로 한 잔을 따라줬다. 차갑고 맑은 사케가 입안에서 퍼졌다. 옆의 외국인들도 나를 보며 같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 한 잔 더. 두 번째 잔은 덜 감동적이었지만, 여전히 훌륭했다.

그 뒤로는 오이절임 한입, 와규 꼬치 한입. 오이는 소금의 짠맛이 물컹한 식감을 절묘하게 잡아주었다. 와규는 말이 필요 없었다. 양은 적었지만, ‘이게 바로 일본식 시장의 맛이구나’ 싶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석조 다리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모강의 노을이 도시를 붉게 물들이는 순간이었다. 나도 그 장면을 놓치기 싫어 셔터를 눌렀다.

노을은 강 위의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저물어갔다.


그렇게 타는 카모강의 노을을 뒤로 한 채, 아침에 맡겨두었던 짐을 찾고 체크인을 마쳤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타쿠상이라는 듬직한 남성이 나를 맞으며 말했다.
“숙소는 여기서 10분 정도 더 걸어야 해요.”
아뿔사, 카모강 바로 옆이라고 생각했던 숙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줬다. 내가 아는 일본어로 떠듬떠듬 이야기하자, 어디서 배웠냐며 반가워하며 웃으며 나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숙소에 도착하니, 아침에 만났던 사쿠라상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제야, 오늘의 고단했던 하루가 비로소 완성된 느낌이었다.

風も水も、ただ流れているだけ。"바람도 물도, 그저 흘러갈 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