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보다, 바로 지금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는 교토의 화려한 일몰

by 빛담

8일째 밤도, 하루하루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여행 내내 매일같이 글과 사진을 남기고 있다. 기록은 밀리면 과거가 된다. 한꺼번에 몰아서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여정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 위해 기록 중이다.

우연히 1일 차부터 어제까지의 글들을 다시 읽었다. 어떤 날은 사진과 글이 잘 어울렸고, 또 어떤 날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부랴부랴 찍어둔 사진으로 글들을 맞춰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내가 저런 생각을 했었나?’ 싶을 만큼 빠르게 사라지는 기억을 확인했다.

최근 본 영상에서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씨가 이런 말을 남겼다.
“‘나중에’라는 말처럼 자신에게 빚을 지는 말은 없다. 그 말 대신 ‘지금’이라 바꿔 써라.”
지금이 주는 힘은 정말 강하다.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고 지금 무언가를 해내는 일, 지금 무언가를 기록하고 남기는 일. 남은 교토의 여정도 ‘나중에’보다는 ‘지금’이라는 말을 더 많이 붙이며, 그 소중한 기억을 값지게 남기고 싶다.


현재 머물고 있는 세 번째 숙소 주변에는 기온 거리와 야사카 신사, 그리고 조금 멀지만 츠타야 서점까지 도보로 이동이 가능했다. 보통 이런 위치는 대중교통의 사각지대라,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도 걷는 것과 시간 차이가 거의 없다.

그래서 오늘은 버스 대신 걸어서, 숙소 주변을 천천히 탐색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약 10분쯤 걸었을까. 기온 거리로 향하는 길목에서 “2025년 일본, 한 해의 한자(今年の漢字)”라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며, 일본이 ‘한 해의 한자’를 통해 한 해를 정리하는 문화가 흥미로웠다.


한자를 보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요즘 한국의 ‘문해력 저하’에 관한 뉴스가 자주 들린다.
문맹이 아니라, 문해력이다. 한글은 규칙이 명확해 읽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문장의 뜻을 이해하는 능력은 점점 떨어진다.

아래는 SNS에서 본 재치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지는 한글 맞춤법 틀림 사례 몇가지를 가져와 봤다.

일치얼짱 (일취월장)

괴자번호 (계좌번호)

사생활치매 (사생활 침해)

왜승모 (외숙모)

일해라 절해라 (이래라 저래라)

쓰고 보니 웃기지만, 실소가 난다. 그리고 문해력과 관련되어선 이런 예도 있었다.

시발점 → 욕으로 오해

금일 → 금요일로 착각

우천시 → ‘수원시’처럼 지명으로 인식

피로연 → 피로를 풀어주는 연회로 이해

SNS에서 본 글들이기에,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뒤엔 씁쓸함이 남는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책 읽기와 한자 공부의 부재로 인한 문해력 저하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한편,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일본인 사쿠라상도 내가 일본어 공부를 하며 책을 즐겨 읽는다고 하자 놀라워했다. “한국에서는 한자 공부를 안 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한자를 알아요?”라며 신기해했다.

사실 나는 한자 공부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자 공부는 단순한 ‘시험용’이 아니라, 우리말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라고.
月(달 월)처럼, 한자의 모양과 뜻, 그리고 그것이 문장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면 언어가 훨씬 풍부해진다.
영어를 세계 속 경쟁력을 위한 공부라고 한다면, 한자는 우리 안의 소통을 위한 공부일지도 모른다.
물론, 어릴 적 ‘깜지’로 쓰며 외우던 방식은 반대지만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기온 거리.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을 본 후, 언젠가 교토를 간다면 꼭 기온을 걷고 싶었다.
낮에는 거의 대부분 마이코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혹시나 싶어 밤에 다시 찾아갔다. 역시나, 없었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등불과 좁은 골목에서 풍겨오는 천년의 기운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곳, 기온 거리가 실제로 촬영지인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봤던 드라마〈잠시 교토에 살아보았다〉가 문득 떠올랐다. 도시의 번잡함을 내려놓고 잠시 교토에서 살아보는 여성의 이야기였다.
그 드라마와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이 이번 여정에서 내가 찾고 싶고, 또 경험해 보고 싶었던 교토의 풍경을 만들어준 듯하다.


기온 거리에서 5분쯤 걸으면 야사카 신사가 나온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주황빛 목조 건물이 인상적이다.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교토에 왔을 때, 아버지는 이곳에 들어가기를 꺼려하셨다. 알고 보니, ‘야사카 신사’를 ‘야스쿠니 신사’로 잘못 들으셨던 것이다.

“아버지, 여긴 전범들이 모셔져 있는 신사가 아니에요.” 그때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야사카 신사는 헤이안 시대(600년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곳으로, 메이지유신 이후 절과 신사가 분리되며 지금은 신사로 남았다. 접근성도 좋아, 기요미즈데라나 기온 거리에서 5분 거리다.
교토를 방문한다면 기온거리와 기요미즈데라를 방문하면서 한 번쯤 가벼이 들러볼 만한 곳이다.


야사카 신사를 뒤로하고 오카자키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플리마켓이 열리는 날이었다.

게스트하우스 화장실 문에 붙어 있던 안내문 덕분에 알게 된 정보였다.

“매월 10일, 오카자키 플리마켓 개최.” 오늘이 딱 10월 10일이었다.

서점에 가기 전, 우선 공원을 둘러봤다. 곳곳에서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눈에 띄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그러다 유독 내 눈길을 끈 것은 ‘아오모리 사과’였다.

아오모리는 일본 본토 북쪽 끝의 청정지역으로, 그곳의 사과는 빛깔부터 달랐다. 주인에게 낱개 판매가 가능한지 묻자 “가능하다”고 답해 주었다.
사과 한 알, 220엔.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달콤함과 상큼함이 동시에 터졌다.

한국에서는 사과가 너무 비싸 자주 먹지 못했는데, 이 한 알이 오랜만에 느낀 ‘사과의 맛’이었다.


오카자키 공원 맞은편의 츠타야 서점으로 향했다.

한국에서도 교보문고를 자주 가는 편인데,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후 일본 서점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읽는다’기보단 ‘구경한다’에 가깝지만 말이다.

너무 글밥이 많지 않은 책을 찾았다. 글밥이 많은 책은, 지난번 100엔 중고서점에서 샀던 ‘사회적 히키코모리’ 책 정도면 충분했다.

오랜 시간을 돌아본 끝에, 커피 일러스트와 짧은 글귀가 담긴『COFFEE TIME』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일상 속 작은 위로를 담은 문장들이, 일본의 정서와 닮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 책을 구매하게 된 좋았던 문구가 있었다.

"今をどう生きるのかを考えていれば、 きっと今日は、 いいー日。"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 오늘은, 좋은 날일거야.'

매일매일 늘 걱정을 달고 사는 나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하는 추상적 질문도 스스로에게 자주 던지는 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따스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츠타야에서 주위를 둘러보다, 지난번 규교토 문구에서 봤었던, 북 아로마를 발견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와이프는 내게 딱히 필요한 건 없다고 했으나,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 작은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었기에, 그녀에게 줄 북 아로마도 함께 샀다.


책 속에 은은히 스며드는 향기라면, 책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알찬 오전을 마친 뒤, 늦은 오후엔 기요미즈데라로 향했다. 해질녘 교토 기요미즈데라에서의 분위기와 장면을 담고 싶었다.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왔을 때는 무척 더웠고, 아이들이 지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이번엔 혼자라 여유롭게 일몰을 기다릴 수 있었다.
입장료는 500엔. 절 안의 명소 한 곳을 제외하면 굳이 입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이번엔 경내에 입장하지 않고, 바깥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보기로 했다.

일몰 30분 전, 하늘은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저물어가는 교토의 하늘을 담았다.

나도 그들 틈에 서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교토의 ‘지금’을 마음껏 즐겼다.

書くことで、心は少しずつ整っていく。"쓰는 일로 마음은 조금씩 정돈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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