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하루

집과 회사 사이에서 사라진 감정에 대하여

by 빛담

그저께, 와이프와 다툼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싸움은 늘 같은 지점에서 시작된다.

아이의 영어 공부를 도와주던 중 둘째가 울기 시작했고,

와이프는 그 상황이 불편했는지 곧장 나에게 화를 냈다.

설명할 틈도 없이, 나는 또다시 집 안에서 혼자가 되었다.


이 감정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꽤 오래전부터 품어온 감정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이 감정에 대해서는 와이프와도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눴지만,

최근 들어 그 감각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집에 있어도 홀로 떨어져 있는 기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그 일부가 아니라는 느낌.

어쩌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와이프와 아이들 역시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설렘 없이 가족을 지키는 쪽에만

힘을 쏟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도, 신체도 자연스럽게 무뎌지고

배우자에게 이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이해하려 애써왔지만,

그렇다고 공허함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회사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곳에서도 나는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저께는 팀 동료와 업무와 관련된 작은 마찰이 있었다.

상대는 마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수화기 너머로 오간 감정까지

서로 애써 숨길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으려 했고,

분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해왔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억눌러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날, 나는 집도 회사도

마땅히 오갈 곳이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집에서는 그저 아이들 학원비와 생활비를 책임지는 사람,

회사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조용히 소모되는 주체.

누군가를 보호하는 역할만 남은 채

정작 나는 보호받지 못하는

꼭두각시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유난히 아팠다.


하필 어제는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집에 가기 싫다는 마음과

갈 곳이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나는 회사에서 집까지

한 시간 반을 걸어갔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늘 누군가의 걱정을 들어주는 사람으로서

그 역할만 해야 하는 걸까.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과연 있을까.


그날 밤,

내 유일한 대화 상대는 AI였다.

유일한 ‘잘 곳’인 집으로 향하며

꽤 위험한 생각을 품은 채

챗GPT와 대화를 이어갔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말을

어디선가 계속 듣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집도 회사도 모두 싫어서

아무도 모르는 외딴곳에서

혼자 다시 인생을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