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후배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박 차장은 카페에 후배들을 먼저 내려준 후 주차를 하기 위해 차를 카페 뒤편으로 몰았다.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고 후배들은 주문을 마쳤는지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박 차장은 후배들에게 눈짓으로 인사한 후 키오스크 앞으로 늘어선 줄에 합류했다. 키오스크 앞에 선 커플은 조잘거리며 빠른 속도로 키오스크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그 뒤에선 모자를 눌러쓴 청년이 귀에는 헤드셋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박 차장은 어떤 음료를 마실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점심으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먹었던 터라 입안을 깔끔하게 씻어줄 음료가 마시고 싶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료는 콜라였다. 하지만 카페에 콜라는 없을 터. 에이드 계열의 음료가 있다면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키오스크 앞의 커플이 주문을 마치고 옆으로 빠졌다. 헤드셋을 낀 청년은 주저함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청년이 결제를 위해 카드를 키오스크에 꼽을 때쯤 박 차장은 문득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나도 아버지처럼 될 확률이 높지. 지난 건강검진에서도 조심하라고 나왔고. 당이 든 건 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입이 텁텁해도 당뇨병을 제 손으로 재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 차장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아르바이트생이 열심히 음료를 제조하고 있는 조리대 위에는 수많은 메뉴들이 적혀있었다. 박 차장이 메뉴판을 왼쪽 위로부터 정독하기 시작했는데 그 앞에 있던 청년이 결제를 마치고 옆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박 차장은 키오스크 앞에 섰다. 커피, 논커피, 에이드, 스무디, 디저트. 그는 화면 상단의 탭들을 눌러보며 어떤 메뉴들이 있는지 살폈다. 각각의 탭마다 20개 정도의 메뉴들이 있었다. 박 차장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 두 명이 줄을 서 있었다. 구석 자리의 후배들을 쳐다보니 음료를 다 받았는지 재잘대며 빨대를 빨아대고 있었다.
후배들은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후배들이 다른 음료를 마시는 걸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젊어서 몸에 열이 많아 더워서인지 친구들과 밤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 피로해서인지 언제나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그도 그의 젊은 후배들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킬까 고민하며 커피 탭을 다시 눌렀다.
하지만 막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자니 꺼려졌다. 그는 얼마 전에 위쪽 어금니에 충치치료를 받았는데 찬 음료를 먹으면 치료부위가 시렸다. 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후배들이 선택했다는 이유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는 것은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맨날 팀장에게 깨지기만 하는 그였지만 적어도 음료 선택에는 주관이 있다는 면모를 후배들에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손가락은 화면 위를 잠시 맴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옆의 따뜻한 아메리카노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는 이내 X자 표시를 눌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취소했다. 건강검진 때 나왔던 위궤양이 생길 수도 있다는 소견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식사 후라고 해도 쓴 커피가 위장에 좋을 리 없었다. 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느덧 그의 뒤에 줄 서있는 사람이 6명으로 늘었다. 후배 중 한 명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반이나 비워져 있었다. 그는 다시 키오스크 화면에 집중했다. 손바닥에 땀이 느껴졌다. 그는 따뜻하면서도 위를 보호해 줄 우유가 들어있는 바닐라빈 라테를 선택했다. 음료를 장바구니에 담고 다음 버튼을 누르려는데 또다시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에게 당뇨병을 일으킨 이 DNA자식이 나도 모르게 당뇨병을 유발하는 다디단 바닐라빈 라테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박 차장은 바닐라빈 라테를 취소하고 다시 홈 화면으로 빠져나왔다.
이쯤 되니 박 차장은 음료 마시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어느덧 9명으로 늘어난 키오스크 줄의 사람들의 짜증 섞인 눈길이 느껴졌다.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후배들 중에는 벌써 커피를 다 마신 녀석도 있었다. 이제 땀은 손바닥뿐만 아니라 손가락, 이마에 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키오스크에서 빠져나가 후배들 자리로 걸어가도 괜찮을까? 후배들이 돈 아끼기 위해 커피 한잔도 못 마시는 쫌생이로 보지는 않을까? 뒷사람들이 이럴 거면 왜 자신들의 시간을 낭비했냐며 원망하지는 않을까?
바쁜 손길로 음료를 제조하던 아르바이트생의 눈에도 박 차장의 초조한 모습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혹시 저 손님이 키오스크의 사용법을 잘 모르는 걸까? 그러기엔 아직 젊어 보이는 데. 억지로 웃으면서 낯선 사람에게 말 거는 건 딱 질색인데. 아, 짜증 나네.’
사회생활 10년 차가 넘어선 박 차장이 아르바이트생의 눈길을 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박 차장도 아르바이트생만큼이나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싫어했고 노땅 취급받는 것도 질색했기에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 카페의 모든 눈이 박 차장을 향하고 있었다. 구석 자리의 후배들, 키오스크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 열심히 음료를 제조 중인 아르바이트생에 더해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했음을 감지한 다른 자리의 사람들까지 모두 박 차장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키오스크 우상단의 전자시계 속 : 표시는 박 차장을 재촉하듯 깜빡거리고 메뉴들의 글자는 온데 뒤섞여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박 차장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경으로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메뉴를 선택한 후에도 사이즈를 선택하고, 추가 옵션을 선택하고, 포인트를 적립하고, 결재를 하고, 영수증을 출력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박 차장의 떨리는 축축한 손은 최대한 빨리 화면의 버튼을 눌렀다. 땀이 스민 손가락 자국이 화면에 남았다.
박 차장은 허겁지겁 영수증을 잡아당겨 챙기고는 후배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후배들은 쿡쿡거리며, 같이 다니기 쪽팔리다는 표정을 지으며 땀 흘리는 박 차장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키오스크에 서있을 때 빤히 쳐다봤으면서 뻔뻔하게도 ‘차장님, 이제 오셨어요’라며 웃기까지 해 보였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칙칙대며 증기를 내뿜었고 아르바이트생은 턱턱 소리를 내며 쇠 숟가락으로 일회용 컵 속 청포도 에이드를 휘저었다. 박 차장이 떠난 뒤, 키오스크의 줄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음료가 나왔음을 알리는 띵동 소리는 경쾌하게 매장을 가득 채웠다.
드디어 박 차장의 차례가 돌아와 음료를 손에 쥐었을 때, 박 차장의 음료가 무엇인지에 관심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페의 모든 이는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을 아쉬워하며 카페 밖으로 나가기에 정신없었다. 박 차장은 차가우면서도 뜨겁고, 쓰면서도 단 음료를 들이키며 후배들보다 앞서서 주차된 차량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