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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br Sep 11. 2020

불편할 권리

하모니 코린의 [줄리엔-동키 보이]가 증명하다

약 90분 동안 비선형적 내러티브 구조를 취하는 '줄리엔...'은 확실히 불편한 시네마다. 영상의 질감은 거친 조약돌의 표면같아(영어로는 'grainy' 하다고 함) 인물의 형체는 모호하며, 조현병에 걸린 줄리엔을 기점으로 그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뭔가 '깨진' 구석이 있다. 직업이 없어 보이며 하나 이상의 결함 또는 타인의 시선에서 결코 정상은 아니라고 느껴지는 줄리엔 가족들의 기이한 행동이 영화의 주요 동력이다. 


'줄리엔...'에서 '계획'이라는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지는 인생을 사는 줄리엔 가족들에게 삶은 자신들의 기이한 행동과 병이 만들어 낸 '현상'에 불과하다. 나치 숭배를 연상케하는 줄리엔의 히틀러 따라하기나, 세상을 떠난 것으로 사료되는 줄리엔의 엄마, 즉 줄리엔의 아버지에겐 아내였을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줄리엔의 레슬러 지망생 형에게 엄마의 드레스를 입으라고 강요하는 아버지(베르너 헤어조그!). 줄리엔의 아이를 가진 그의 여동생 펄(클로에 세비그니)은 수화기 너머로 죽은 엄마를 연기하며 줄리엔의 모성 결핍을 채워준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레슬러 지망생 형의 외롭고 고된 훈련은 경제적 지원 없이 오기만 채워주려는 아버지로 인해 기약 없는 몸짓에 불과해 보인다. 또한 하프를 퉁기는 펄에게 예술 나부랭이를 한다며 재능 없는 화냥년(slut / 줄리엔의 아이를 임신한 것 때문에 나온 말이라 보인다)이라 비난한다. 그에게는 아내를 잃었다는 속사정이 있고, 아버지의 가학적 태도에 줄리엔과 그의 형제들은 그저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어차피 지나갈 일이지만 반복될 일이기에 관계에서 일어나는 난장은 무미건조한 '현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줄리엔의 집안은 '여하튼' 그들만의 방식으로 굴러간다. 만삭이 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이스 스케이팅을 나간 펄이 다리를 헛디뎌 넘어진다. 아이는 유산된다. 줄리엔은 이미 숨이 끊어진 핏덩이를 안고 병원 밖으로 도망친다. 집 안 침대로 들어가 이불 안에서 아이를 부둥켜 안고 기도를 한다. 근친상간도, 아이를 잃은 것도, 오프닝 씬에서 거북이를 주지 않는 꼬마 소년을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땅에 묻으며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줄리엔의 기도도 이 모든 것들이 영화 내내 해프닝(Happening) 내지 삶의 현상처럼 그려진다.
 
모든 영화 소품은 현장의 촬영지에 있는 것으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도그마 95의 서약이 의의하는 바는, 환상을 심어주거나 현실을 고발하기도 하는 영화 이전의 태초의 목적, 즉 '활동 사진'으로서 지금 이 순간, 움직이는 모든 현상에 인위를 가하지 않되, 현장에서 감독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창의력을 실험하는데 있지 않았나 한다. 물론 코린이 도그마 서약을 온전히 지킨 것은 아니며, 이후 도그마 서약 아래 제작된 많은 영화들이 그들의 규칙을 어겼다.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영화의 장르적 한계(장르를 배제하는 것 역시 서약 중 하나)를 뛰어넘으려 했던 이들의 실험은 과거의 해프닝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창작의 '현상'을 담아낸 필름은 영원히 남아 시청자에게 '불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인간이 왜 한 번쯤은 관습에서 벗어나봐야 하는지, 왜 스스로 상황적 제한을 두면서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지 물음표를 던지며 정적인 감상의 프레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한다. 자고로 모든 예술 작품은 불편해야 제 맛이다.


Julien Donkey-Boy 

(국내 미출시 / Harmony Korine / Harmony Korine / 391 Productions, Forensic Films, Independent Pictures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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