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피워낼 봄의 내 꽃이여

나의 겨울이 아주 길었던 이유는 찰나 같은 봄이 나를 피워내기 위함일지도

by 에이첼

어느 날이었다.

땅 속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 기억이 땅 위의 아지랑이처럼 이랑이랑 오르던 그런 날이었다.


그날은 내가 웅크린 땅 속이 더 이상 차갑지 않음을 느꼈던 날이기도 하다.

뭔지 모르게 내 몸을 조금씩 꾸물꾸물 움직이고 싶기도 했고,

팔과 다리를 쭈욱 기지개 켜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문득 땅 위가 궁금해지는 그런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눈을 살짝 떠보니 희미하게 밝은 빛이 눈앞에 그려져 있었다.

땅 속이 이렇게 밝았던가.

아니면 내 마음이 밝아진 건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호기심이었다.


강렬한 그날의 호기심은 나의 무거운 몸을 서서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내 몸 위의 흙을 조금씩 털어내며 나는 땅 위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차가웠던 겨울이 오랜 기간 머물다간 흔적을 남긴 채,

기어코 봄이 그 자리를 따뜻하게 메워가기 시작했다.


봄 햇살이 너무나 눈이 부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었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햇빛에 눈을 맞추었다.

햇살이 너무나 그리웠던 것이다.

따뜻함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리고 혼자가 너무나 외로웠던 것이다.


그렇게 밉고 싫었던 겨울의 내가,

죄책감과 함께 보낸 외로운 겨울의 내가 가여웠다, 불쌍했다, 미안했다.


미안해, 나야.

널 외롭게 두어서 정말 미안해.


거창하게 내가 무엇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긴 겨울의 시간이 아깝게 흘러간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헛되이 보낸 시간일 수도, 혼자 청승 떤 시간일 수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외롭게, 위태롭게,

끝끝내 내가 포기하지 않고 버틴 겨울의 시간은,

나도 봄에 피어날 수 있다는 든든한 마음의 편이 되었다.

버티기만 한 시간도 절대 아깝게, 낭비하듯 흘러간 시간이 아니란 것을.


나는 이제 오랜 기간 있었던 땅 속에서 나와,

아주 길고 먼 미지의 탐험을 시작했다.

그 길 끝에 뭐가 있을지 몰라 두렵고 무섭다.

정말이다.

그렇지만 탐험을 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그리고 가여웠고 불쌍했고 외로웠던 나에게,

마음을 가득 채울 온기를 찾아주고 싶다.


그 온기로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우라고,

그렇게 응원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포근한 눈에 가려진 칼날의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