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게으름을 보는 조금은 불편한 시선

AI 시대, 인간이 멈춘다는 것의 의미

by Jung Jay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지금은 바쁘게 살아야 하는 시대라고, 게으름은 도태와 무능력의 징표라고 말이다. 누군가가 SNS에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라고 올리면, 그 아래에는 “부럽다”, “그럴 여유가 어딨어요?”라는 댓글이 달린다. 한가롭게 쉰다는 것조차 무언의 비교와 경쟁의 무대가 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진정 쉬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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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기술적 진보와 편리함 속에 있다. 전통적 육체노동은 줄어들고,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손을 대신한다. 스마트폰과 인공지능, 자동화 시스템은 사람 없이도 많은 것을 처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는 왜 더 피곤하고, 더 조급하며, 더 쉬지 못하는 걸까?


이 질문은 오래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는 1932년에 이렇게 썼다. “현대 문명은 여가를 즐길 줄 아는 능력 없이 발전해왔다.” 러셀은 하루 4시간 노동제를 제안하며, 나머지 시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여가로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게으름'은 그저 일하지 않음의 상태가 아니라, 노동과 존재를 분리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선언이었다. 그는 일하지 않는 시간을 무의미한 시간이라 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 예술, 철학, 창의성이 피어난다고 믿었다.


반면, 현대 사회가 제안하는 게으름의 해석은 사뭇 다르다. 뇌과학 기반 자기계발서 『게으른 뇌에 행동 스위치를 켜라』에서 저자 오히라 노부타카는 게으름을 뇌의 비효율적 작동 패턴으로 본다. 즉, 게으름은 교정이 가능한 행동의 문제이며, 의지를 갖고 관리할 수 있는 일종의 뇌 습관이라고 보는 것이다. 오히라는 여러 가지 행동 루틴과 시각적 자극을 통해 게으름을 극복하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관점에서 게으름은 결함이며, 우리는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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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의 메시지는 현격히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된 전제를 공유한다. 바로 '게으름'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삶과 존재, 그리고 사회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 의미와 해석의 방향은 전혀 다르다. 러셀은 게으름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려 했고, 오히라는 게으름을 버리고 인간으로서 더 나아지자고 말한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이 두 목소리는 어떤 울림으로 다가갈까? 현실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기술은 점점 더 인간의 일을 대체하고 있지만, 청년들은 더 바빠지고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는 물음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인공지능이 일하고 로봇이 움직이는 사회가 도래했음에도, 인간은 여전히 ‘휴식 없는 경쟁’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라고 믿었지만, 그 기술은 오히려 더 정교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측정하고, 재촉한다.


‘슬기로운 소비’, ‘효율적인 삶’, ‘시간 관리의 기술’ 같은 키워드는 우리 삶을 잠식해버렸다. 쉬는 시간조차 “잘 쉬는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성과화된다.


게으름을 사유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재를 사유하는 일이다. 이는 단지 일하지 않는 상태의 미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우리는 멈추지 못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가닿는다. 러셀은 노동의 신화를 무너뜨리고,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의 이상은 다소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안에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한 줄기가 흐르고 있다. “당신은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게으름은 언제부터 인간의 결함처럼 여겨졌을까. 근대 산업사회의 출현과 함께, 노동은 신성한 것이 되었고, 게으름은 그 반대말이자 죄악처럼 규정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말은 종교적 윤리를 넘어 사회 규범이 되었고, 생산하지 않는 존재는 사회적 무가치함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우리는 그런 세계 속에서 교육받고 자라왔다. 어릴 적부터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법을 배우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자라났다. 그렇게 ‘쉼’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기술적 전환의 경계에 서 있다. 5차 산업혁명은 인간과 기계, 인간과 AI의 협력을 전제로 한다. 반복적인 육체노동과 계산은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되고, 인간은 더 창의적인 것, 감성적인 것, 관계적인 것에 집중하게 된다는 청사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질문이 숨겨져 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현실은 기술이 인간을 더 쉴 수 있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자기관리’와 ‘자기계발’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예전엔 그냥 책을 읽던 사람이 이제는 ‘책을 읽고 리뷰하고 콘텐츠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되었고, 산책을 하던 사람은 ‘산책을 하며 생산성 있는 팟캐스트를 듣는 사람’이 되었다. ‘비움’은 더 이상 공허하게 허락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목적과 연관되어야 하고, 게으름은 일종의 자기 관리 실패로 취급된다.


이런 상황에서, 러셀이 말한 게으름의 찬양은 하나의 지적인 저항으로 보인다. 그는 게으름을 단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존재로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말한다. “우리 문명의 진보는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 있다.” 이는 단지 시간을 보내는 문제가 아니다. 여가, 게으름, 멈춤은 인간의 감정, 사유, 관계를 깊어지게 하는 전제 조건이다. 기계는 쉴 필요가 없지만, 인간은 쉼을 통해 인간다움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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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AI 시대의 청년들은 그 쉼마저도 ‘불안’과 싸워야 한다. 게으름을 선택할 자유는 사실상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안정성을 기반으로 한다.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에게 러셀의 4시간 노동제는 공허한 말일 수 있다. 반면, 오히라 노부타카의 책은 그런 이들에게 보다 직접적인 현실 대응 전략을 제공한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답하며, 실천 가능한 습관 변화와 효율 개선을 통해 현실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내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오히려 현대 청년들의 불안을 더 실질적으로 위로하는 측면도 있다.


두 책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시선이 서로 배타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라의 방법론은 일상의 작은 행동을 바꾸는 데 유용하고, 러셀의 사유는 그 행동의 궁극적인 의미를 되묻는 데 강력하다. 전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고민이고, 후자는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다. 우리는 이 두 질문 모두를 품고 살아야 한다. 특히 AI와 함께 살아갈 21세기의 청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사람일수록, 게으름을 두려워한다. 그들에게 게으름은 멈춤이 아니라 퇴보처럼 느껴진다. '이만큼 해왔는데, 지금 놓으면 무너질 것 같다'는 감정, 그건 단지 강박이나 욕심이 아니다. 그 안에는 어떤 책임감, 스스로에 대한 약속, 그리고 타인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는 깊은 배려가 숨어 있다.

그러니 부지런한 사람의 게으름은 무책임이 아니라, 어쩌면 '조심스러운 회복의 언어'다.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쉽게 멈추는 것을 허락하지 못한다.

“게으르면 안 돼”라는 말은 결국 “지금의 나를 지키고 싶어”라는 속삭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부지런함도, 정주영의 부지런함도 결국 시대와 공동체를 위한 절실한 실천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 5차 산업혁명과 AI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인간이 부지런해야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강박은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 게으름은 누군가에게는 도피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유일한 통로'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으름은 '모든 부지런한 사람들이 가장 늦게 도달하는 깊은 휴식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기술을 마주할 것이다.

로봇은 멈추지 않고 일할 것이고, 인공지능은 더 정확하고 빠르게 사고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만이 쉴 수 있고, '쉴 때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말해도 된다.

“나는 오늘 조금 게을러도 괜찮다. 그건 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은 용기다.”

이제는 부지런함 속의 게으름조차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사회, 그런 시대를 향해 우리가 걸어가기를.

그 길의 시작은, ‘쉼’을 허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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