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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나눔의 결과..선의는 어떻게 좌절되는가

by 시호

좋은 마음을 갖고 결정한 일이었다. 수년 간의 직장 생활 중 습득하게 된수많은 가수들의 CD.

해가 지날 수록 쌓여가는 CD를 보면서 더 이상 저장할 공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는 물론 넓지도 않은 집안 곳곳의 수납공간을 차지하게 된 CD를 보면서 무언가 결단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가게 같은 곳에 기부를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회사에서 이런 기부가 진행되고 있었고, 갖고 있던 수많은 CD를 보내려고 절차를 알아봤다.

그런데.. 청전벽력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받은 CD들은 기획사에서 음반홍보를 위해 제작한 비매품. 판매용이 아니란 말이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기부 활동은 물품을 기부받아 판매한 금액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비매품' CD들은 아쉽게도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생각한 두 번째 방법은 블로그에 해당 CD의 사진과 설명을 올려 댓글을 달아준 사람들에게 보내주는 것이었다. CD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무료로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갖게 되니 좋고, 나 역시 처지곤란인 CD들을 좋은 방법으로 정리할 수 있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물론 택배비는 CD를 배송받는 분이 지불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좋은 취지에서 시작하는 CD 무료 나눔이지만 택배비까지 내가 모두 부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솔직히 배송 중 CD가 손상되지 않게 뽁뽁이로 포장하고 서류 봉투에 넣어 택배를 보내는 게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개인 블로그에 '무료나눔' 글을 올렸고, 어떤 네티즌이 해당 CD를 갖고 싶다는 댓글을 달았다. 나눔 글에 명시했듯 평일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는 나는 주말에만 택배를 보낼 수 있다고 사전 공지했고, 주말이 다가오자 CD가 파손되지 않게 뽁뽁이로 포장을 하고 서류봉투에 담아 편의점으로 향했다. 착불로 보낼 수 있었지만, 받는 이의 개인정보 보호와 택배비를 줄여주고자 편의점 반값택배를 택했다.


받고 싶어한 네티즌이 알려준 편의점과 이름, 연락처를 기재하고 편의점 반값택배를 이용해 소포를 부쳤다. 소포를 편의점 직원에게 건네기 전 사진을 찍어 인증샷을 댓글로 단 나는 해당 네티즌에게 계좌를 알려주며 반값 택배비 1600원을 부쳐달라고 요청했다. 이미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1600원이 없어서 돈을 부쳐줄 수 없다며 다음달에 보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1만원이 훌쩍 넘는 CD를 택배로 보내주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집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편의점까지 걸어가 택배를 부친 결과가 이렇다니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당근마켓도 물건을 넘김과 동시에 바로 현금을 주고받는 것이 예의인데 하물며 무료로 물건을 받는데 택배비까지 지불하지 않으려 하다니.. 해당 네티즌은 이미 물건을 부친 사진을 봤으니 자신이 택배비를 떼먹어도 될 것이란 생각을 한듯 보였다. 괘심했다.


그래서 나는 택배를 부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댓글을 달았다.


"그럼.. 그냥 제가 편의점에 가서 물품을 수거하고 배송을 취소하겠습니다. 택배비는 보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답글을 달자 해당 네티즌은 분노했다.


"내가 돈을 안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음달에 주겠다는게 갑자기 안보내겠다니 무슨 말이냐."


순화해서 적은 답변이다.

선의로 시작한 무료 나눔을 위해 1600원의 택배비까지 내가 부담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 선의를 이용해 CD만 받아 챙기려한 해당 네티즌의 행동에 화가 났다.


결국 나는 얼른 발걸음을 재촉해 편의점으로 향했고, 해당 CD를 다시 수거했다. 이렇게 업무 중 얻게 된 수많은 CD를 무료로 나누려던 나의 선의는 좌절됐다.

해당 네티즌은 한 마디 사과도 없이 CD를 보내달라며 달았던 댓글을 삭제했다.

하하하,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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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험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종종 접한 '당근거지'란 말이 남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선의를 갖고 행하는 '무료 나눔'에도 예의가 필요한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을 느꼈고, 이런 경험은 꽤나 불쾌한 감정을 동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분간 무료나눔은 하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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