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원, 150만 원... 간절해서 당했던 세 번

간절함은 때로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

by 김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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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빠진 곳은 물이 아니라 '조급함'이라는 늪이었다. 1억 2천만 원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경제적 자유'라는 달콤한 잔상이 남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시스템은 죄가 없다. 회사가 나빴을 뿐이다. 진짜 제대로 된 회사를 만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나는 S사 시절의 성실함도, 기능반 시절의 끈기도 아닌, '무언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의 '지하 2층' 탐험이 시작됐다. 이전의 1억 단위 사기가 '대형 재난'이었다면, 이후 이어진 사기들은 찌질하고 비참한 '연쇄 사고'였다. 어떤 사람은 "확실한 마케팅 수익 모델이 있다"며 100만 원을 요구했다. 어떤 리더는 "초기 선점 기회다, 이번엔 진짜다"라며 150만 원, 180만 원을 불렀다.


나는 남은 돈을 긁어모아 그들에게 건넸다. "이번엔 진짜겠죠? 저 이번엔 정말 잘해야 해요."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돈을 입금하자마자 연락이 뜸해지더니, 결국 연락이 두절 되었다. 어떤 주최자는 아예 번호를 바꾸고 도망갔다.


화려한 태국 세미나도, 거창한 비전 선포식도 없었다. 그냥 동네 양아치 같은 사람들에게 내 간절함을 이용당한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이 너무 간절해지면, 이런일이 발생 되는건가?" 냉정하게 보면 좀 더 신중 했어야 하는게 맞았다.


스스로 분석하지 않고 사람을 믿고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당시 내가 했던 것중 한가지난 코인 IPO 투자자 모집이였다. 그전 코인 다단계로 홍보한 글을 읽었는지 제안 메일은 많이 왔었다. 자신의 코인을 홍보해달라는 말이다.


그래도 마케팅 실력은 있구나라는 안도감 정도는 있었다. 나는 그런 제안들이 '희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투자자를 모집하고 나면 토큰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번엔 일이 틀어지게 되면 환불을 무조건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역시나였다.


나는 또 나를 믿고 투자한 사람에게 내 돈으로 물어주기에 이르렀다. 나를 속인 건 그들이었지만, 속아주기로 작정한 건 '조급한 나'였다. 그렇게 세 번정도 연이은 사기를 맞았다. 통장 잔고는 이제 완전히 비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나 한양공고 기능반 출신이야. 나 S사 다녔던 사람이야. 나 태국에서 상도 받았어." 과거의 영광을 아무리 되뇌어도, 거울 속에 비친 나는 그저 사기꾼들에게 당하는 20대의 백수일 뿐이었다. 그 무렵,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건 '나이'와 '사랑'이었다.


어느덧 내 나이 26. 그리고 내 곁에는 S사를 퇴사하고, 코인으로 돈을 날리고, 사기를 당해 무너지는 꼴을 다 지켜보고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여자친구(지금의 아내)가 있었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100만 원 사기에도 휘청거리는 지금의 내 꼴로는 도저히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다.


'경제적 자유'도 좋고 '파이프라인'도 좋지만, 당장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타협하자. 아니, 전략을 수정하자.'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사업으로 대박을 칠 그릇이 아직 안 된다는 것을. 일단은 생존해야 했다. 고정적인 현금 흐름(Cash Flow)을 만들고, 다시 종잣돈을 모아야 했다. 그래야 결혼도 하고,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딱 30살까지만 더 도전해본다!"


나는 다시 도전하려고 일어났다. 그떄 나에게 전화 한통이 온다. '내 사업의 마케팅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그동안 지켜봐왔었다고 말이다.' 그 분은 내가 1억 2천을 날렸던 코인을 함께 투자했던 분이셨고, 내가 마케팅하던 것을 1년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셨다.


나를 포함해 직원 3명으로 시작했지만, 이를 악물고 내 마케팅 실력이 진짜라면 여기서 한번 더 검증 해보고 내 것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 분하고 헤어졌지만, 당시 직원 5명과 블로그 관리 20개, 현장 팀장 10명이 넘는 쾌거를 이루고 나왔다. 마케팅 업계에선 난이도 있는 상위 3종 직업이 있는데, 그중 부동산, 인테리어로 구르던 나는 이렇게 현장감 넘치는 업종이 어렵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곳에서 완전한 자신감을 얻었고 마케팅 교육과 대행사를 차리기 위해 나왔다.


내가 아는 후배와 함께했고 첫 6개월은 순항이였다. 하지만 세상이 나를 억까라도 하듯이 또 다시 위기가 찾다. 주변 친구들도 진짜 말도 안된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건 바로 '코로나'였다. 우리와 함께 계약 맺고 파트너를 맺었던 업체들이 전부 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 또한 6개월을 더 버티다 결국 접게 되었다.


이후 몇군데 마케팅 팀장으로 활동했다. 취직은 어렵지 않았다. 성과도 잘 나왔다. 무엇보다 확실한 전략이 있었고 나를 응원해주던 수강생 분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3년이 더 흐른 후.. 29살이 되던해 난 양복을 꺼내 입었다.


3년간 성과가 없던건 아니다. 무엇을 시도하든 결과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닌 전부 남에 의해 휘둘리기 시작했고 버티지 못했다.


5년 전, "나는 부품이 되지 않겠다"며 호기롭게 던져버렸던 사원증을 다시 목에 걸었다. S사라는 타이틀과 기능대회 동메달 덕분에 재취업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가짐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분노'였던 것 같다.


나의 회사생활은 너무 순탄했다. 어렵지 않았다. 회사에선 모르면 물어볼 선배들이 있었고, 내 성격은 사회생활에 적합했다. 또래들도 많았고 어려울게 없었다. 같이 야근도 하고 고생하고 나면 전우애가 싹텄다. 그렇지만 내 마음과 생각은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보지 않았다.


이곳은 나의 '재기를 위한 베이스캠프'다. 여기서 버티며 돈을 모으고, 결혼을 하고, 밤에는 내 진짜 칼(N잡)을 갈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야망가로 사는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의 치열한 'N잡 생존기'가 진짜 막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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