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잃는 건 복구할 수 있다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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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나에게 '새 출발'의 해였다. 3월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고, 8월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째가 태어났다. S사 퇴사 후 롤러코스터 같았던 내 20대가 비로소 안정을 찾는 듯했다. 회사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고, 나는 그 안에서 착실하게 가장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폭풍우는 언제나 가장 고요한 순간에 몰아친다고 했던가. 외벌이라 혼자 버텨내기도 힘든 시간속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 비극은 예고도 없이,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아들... 집주인이 연락이 안 된다."
아버지였다. 평생 성실하게 일하셨던 아버지가 은퇴 후 마련한 전세집. 이 전세집도 대출이 무섭다며 간신히 마련한 집이다. 그런데 그 보증금을 집주인이 들고 잠적했다는 것이다. 당시 뉴스에서나 보던 '전세 사기'가 우리 가족의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락이 아에 안됐던건 아니다. 이 전세사기는 뉴스에도 나올정도로 큰 사건이였고, 우리의 사건도 기사화 되었다. 이름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전세대원들이 우리집에 모였고 집주인도 모여 회의를 가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한 그는 꽁지빠지게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우리 모두는 어이가 없었다. 전세사기로 몰려 상황이 위급해지자 '도망'을 친다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도 차마 막지 못했다.
평생 모은 재산이 허공으로 사라졌다는 충격. 우리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이건 현재 진행형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주인은 징역 8년형을 선고 받아 현재 감옥살이 중이다. 아버지는 끝내 사건이 해결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으셨고 그 큰 스트레스는 지병이었던 아버지의 심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심장 질환이 악화되었고, 치료를 받으면 괜찮아 질 줄 알았다. 병원은 꾸준히 다니고 있었고, 그렇게 심장질환인줄만 알았다..
모든 것이 너무 빨랐다. 전세 사기의 충격을 수습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져 갔다. 이상하게 생각했다. 물론 병원을 빨리가려고 했으나 이번엔 의사들의 파업으로 쉽사리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나는 당시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렇게 2달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응급실에서 간신히 진단을 받을 수 있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곧바로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동생과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일상을 살고 있었고 어머니만 병간호를 진행했다.
당시 코로나도 겹쳤었기에 1인 면회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일이나 지났을까 어머니의 우는소리와 함께 우린 뜻밖의 병명을 들었다. '암 말기라고 하신다..'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병상에 누워 계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떠나기 전까지 나를 찾았다고 하셨다. 이유는 집에 너무 가고 싶었다고 하셨다. 병원에 입원할 당시 내가 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그게 생각이 나셨는지 어머니께 빨리 큰아들 부르라고 새벽내내 얘기하시다가 갑자기 조용해 지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드디어 잠이 들었나보다 라는 생각에 옆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상주 완장을 차고 멍하니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마케팅? 코인? 사업? 경제적자유? 모르겠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지인들이 오면 '허허허'거리고 다녔다. 나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무력했고, 죄송했다.
나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사는 차에서 병원에 가는 길이였다. 뜬금없이 아버지가 뒤에서 '아들아 난 이제 얼마 안남았다'고 말씀하셨다. 난 울컥했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수술받으면 나아질거라고 했다. 그 말씀을 듣곤 조용히 입을 다무셨다.
그게 마지막 대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S사를 다닐 때 핸드폰을 바꾸기 위해 상조를 들어놨었다. 그것도 10년짜리로.. 그것을 이렇게 사용하게 되었다. 식장은 남부럽지 않게 제일 큰 VIP장으로 잡았다. 가실때 만이라도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나는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현실적인 문제들을 정리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보험금'이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보험을 꽤 여러 개 가입해 두셨다. "나중에 자식들한테 짐 되기 싫다"며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셨던 기억이 났다.
보험처리는 동생이 하기로 했다. 전세 사기로 날린 돈은 어쩔 수 없더라도, 이 보험금으로 어머니의 노후와 남은 빚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생의 말을 듣고난 후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지급 가능 보험금: 0원.
이건 또 무슨일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 몰래 돈을 내오셨는데 받을 게 없다니? 알고 보니 가입된 보험들은 전부 '껍데기'였다. 아에 없던건 아니다 사망보험금 2천만원, 나라에서주는 2천만원 총 4천만원이다.
정작 필요한 심장 질환이나 암 전이에 대한 보장은 쏙 빠져 있었다. 받을 수 있는 조건들은 교묘하게 비켜나 있었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보장은 작동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설계사가 좋다고 해서", "아는 지인이 들어달라고 해서" 가입하셨던 것이다. 그 설계사들은 아버지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피눈물을 흘렸다. 전세 사기로 재산을 잃고, 병마로 아버지를 잃고, 믿었던 보험마저 배신했다. 세상이 나를 상대로 거대한 사기극을 벌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무지가 죄다. 몰라서 당한 거다.' 부동산을 몰라서 전세 사기를 당했고, 금융을 몰라 아무런 상관없는 보험에 돈을 부었다. 내가 마케팅으로 돈 버는 법만 연구할 때, 정작 내 가족을 지키는 방패는 다 뚫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시는 무지해서 당하지 않을꺼야.. 가족은 내가 지킬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또 했다.
아무튼 받은 돈은 어머니께 드리고자 다짐했는데 전세사기로 남은 대출금이 딱 4천만원이였다. 아버지가 남겨준 돈은 그렇게 빚을 갚는데 전부 소진되고 남는건 하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토끼같은 자식이 있었다. 와이프 뱃속에는 둘째가 자라고 있다.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현실을 지켜가기 급급했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보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돈을 '버는' 공부는 20살 첫 월급 탈 때부터 했었고, 이번엔 돈을 '지키는' 공부를 시작했다.
약관을 해부하고, 보장 내용을 뜯어보았다. 처음에는 우리 가족의 남은 보험이라도 점검하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보이기 시작했다. 이 복잡한 금융 상품 속에 숨겨진 함정들이, 그리고 반대로 잘만 활용하면 자산을 지키고 불릴 수 있는 기회들이. 주변 지인들의 보험을 봐주기 시작했다.
그들도 우리 아버지처럼 엉터리로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정확히는 엉터리라기 보다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보험들로 가득찼다. 하나둘씩 뜯어고쳐주자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왔다. 어느새 나는 깨달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영업이 아니었다. '나처럼 몰라서 피눈물 흘리는 가장이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게 하지 못한 효도를 세상에 갚는 길이자, 이제 막 태어난 내 아이와 가족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마케팅 기술자였던 내가, 가장 힘들다는 오프라인 보험 영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건, 바로 이 처절한 '0원의 성적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