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광개토왕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이 글에서는 광개토태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내가 광개토태왕을 알게된건 초등학생 1학년때였다. 드라마 대조영 마지막화에서 대조영이 광개토태왕릉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모습을 보고 문득 궁금했다. “저게 뭐길래 대조영이 그러지? ” 이 궁금증으로 아빠에게 물어봤고 아빠는 대조영,연개소문 보다 더 강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했던 왕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난 놀랬고 이후 위인전을 읽게 되면 항상 광개토태왕 부터 읽곤했다. 그에 대해서는 머리기 굵어지고도 항상 로망을 품고 대했다. 사학과에 와서도 그의 정복활동,그의 업적에 대한 논문을 남들 보다 더 많이 읽고 일부로 그에대해 더 공부하고 그랬다. 나에게 광개토태왕은 역사를 좋아하게 만든 원동력 그자체였다. 그런 내가 5월5일 어린이날에 그의 비석과 무덤을 보러간다. 참으로 설렌 일이 아닐수가 없다.
마침내 해가 뜬 2025년 5월5일 , 또 다시 눈이 일찍 떠졌다. 한낱 알코올 따위가 내 설렘을 막지 못하였고 평상시에는 결코 일어나지 못할 5시에 일어났다. 들뜬 마음을 주체되지않아, 호텔 근처에서 열리는 새벽시장을구경하러 나왔다.
호텔 앞에 국내성 성벽이 바로 앞에 있다. 눈앞에 국내성 성벽이 있는 풍경이 나는 낯설고 신비해 성벽을 둘러봤지만 이 곳 사람들은 너무나 익숙하게 성벽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게 보였다. 혼자 성벽을 따라 걷다 다시 호텔 입구로 왔을때 우연히 일행분들중 한 분과 만났다. 잠시 이야기하면서 압록강을 다시 좀 보다가 시장으로 가기로 했다. 어짜피 걸어서 5분거리밖에 안되기도 하니 시간적 여유가 충분할거라 생각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또 다시 아 진짜 동안이라고 하셔서 너무 감사했다. 내가 역사학과 학생이라니까 광개토왕비를 보고 많은걸 느껴보라 하시셨다. 2시간뒤 정말 많이 느끼게 됬지만 그때까지는 그저 격려정도로만 생각했다.
압록강에 도달하자 시장에 가기 직전 잠시 어제 본 호텔 앞에 있던 압록강을 잠시 봤다. 날씨가 흐려지니 어제는 아름다워 보였던 곳이 왠지 무섭게 보였다. 날씨가 흐려 별로 풍경이 좋지 않아 금방 돌아왔다. 같이 계시던 분은 압록강을 좀 더 보다가 가신다 하셨다.
아침 시장은 활발했다. 사람 사는건 다 똑같다고 생각들 정도로 한국과 다를게 없어보였다. 혼자 시장 구경을 하던차 그 전날 양꼬치를 같이 먹은 분들을 만나 구경을 하다 또 다른 일행들도 만나서 갔다. 이분들이 찹쌀도너츠도 사주셨는데 갓 튀긴거라 너무 맛있었다. 한국처럼 설탕까지 버무렸다면 추가로 5개는 더 사서 먹었을것이다.
찹살도넛이 내 입맛을 돋구었고, 이어서 만두가 먹고 싶었다. 많은 가게에서 만두를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서 되게 맛있어 보였다. 그전에 먹은 최악의 만두때매 큰 기대를 안하려 했지만 저 만두들의 비주얼이 정말 장난아니였다.
그런데 왠걸..;.심각하게 맛이 없다. 따뜻하긴 해도 만두속이 정말 뭔지 모를 맛이였다. 한입 먹고 버릴 수준이였다. 역시 만두는 한국 비비고가 최고다.
대신 양탕은 상당히 훌룡했다. 사골국에 양고기를 넣은 느낌이라 당장 내 캐리어에 있던 햇반을 돌려와서 먹고 싶은 맛이였다. 그전날 술먹어서 그런가 확실히 국물을 먹으니 확 내려갔다.
돌아 오는길에 한국어로 "패밀리 국밥"이라 적힌 곳을 봤다. 과연 패밀리 국밥이 뭘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패밀리 국밥 바로 근처에 작은 마트가 있어서 한국에서 팔지 않는 생콜라를 샀다. 그러고도 여전히 시간이 남아 돌아 잠깐 광개토태왕에 대한 책을 읽은뒤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8시에 체크아웃인데 혼자 7시 45분에 내려와서 가이드님이 15분이나 혼자 빨리 오셨어요? 하고 여쭤보셨다. 태왕비를 볼 생각에 어쩔수 없었다고 답변했다. 내 말과 표정을 본 가이드님은 답사중 오늘이 제일 행복해보인다고 하셨다.
8시가 되고 일행분들이 오자 마침내 버스에 올라탔고 출발했다. 목적지는 광개토태왕비. 호텔에서 이동은 10분밖에 안걸렸지만 답사중 가장 설렌 순간이였다. 잠깐이라도 버스가 빨간불에 정차하면 신호등을 뽑아 저 멀리로 던져버리고싶었다.
도착했다는 말에 바로 내렸다. 저 붉은 기와누각 아래 태왕비가 보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저 기와 누각이 눈에 들어왔으며 무척 흥분했다. 입장을 하고 천천히 걷다 보니 강화유리 속에 갇혀 있는 저 비석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아무도 없을때 비석을 찍으려 하신 용만소장님이 전력질주로 달려가셨다. 나는 용만 소장님의 그 속을 모른채 오직 광개토태왕비를 볼 생각에 부푼 마음으로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마침내, 왔다. 인터넷에서만 본 그 비석이 현재 내 앞에 있다.
요동, 동부여, 숙신, 거란, 한반도 남부까지 고구려군을 보내 동아시아를 호령한 광개토태왕의 무훈이 적힌 비석, 그야말로 진정한 고구려의 기상이라고 할수 있는 저 비석에 앞에 도달했다. 친구들은 일본,미국,유럽에 가고 싶다할때 저 비석을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에 가보고 싶다한 어느 어린 아이의 소망이 드디어 이뤄졌다.
아무도 없는 비석을 찍으려는 분들이 있어 바로 달려나가지는 못하고 비석을 보고 놀래 벌어진 내 입을 틀어막으며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사진을 찍는것을 마무리 했다는 말을 듣고 단번에 달려 나갔다.
아직 누각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고 조금 거리를 둔 상태에서 봤음에도 저 거대한 비석은 나를 압도했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꽉 잡은듯한 기분이 들정도였다. 혹시 광개토태왕의 영혼을 느낀것일까? 그렇다면 더할나위없는 영광이다.태왕폐하 저 취직이랑 연애좀 하게 해주세요.
안에서는 사진촬영이 허용되지 않기에 방탄유리에 대고 최대한 가까이 찍었다. 가까이서 광개토태왕비를 본 소감은 "영롱하다"이다 . 1600년이 넘는 세월간 저 거대한 비석은 나를 맞이 하는데 감히 영광스럽다는 감정마저 들었다. 저 추모왕부터 이어온 고구려 왕실의 신화,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광개토태왕의 유언과 함께 수묘인 제도까지 전부 기록된 이 비석은 나에게 말을 거는듯했다. 이 순간이 어찌 영롱하지 않다 할수 있을까. 이 날을 위해 지금까지 고구려를 좋아하고 공부해온것일까?
광개토태왕에 대한 책을 중고등학생때 내내 읽고, 군대에서 받는 인터넷 편지로 저 비문 해석본을 보내준 지인 덕분에 저 태왕비문를 다시 앍고 과제들 대부분을 이 비석과 고구려에 대해 쓰고 지금까지 내 행동들을 보상하는 이 기분, 정말이지 행복했다.
이 이후로 누각안에서 봐서 3면과 4면을 찍는것을 잊고 그저 눈으로만 바라봤다. 비록 한문 실력이 좋지 않아 "太王" "英樂"만을 읽을뿐이엇지만 내가 감히 이 글자를 직접 읽은것 자체가 행복했다.
비석 일부를 재현 해놓은 것도 중국측에서 전시하고 있다.
신나서 보는데 이동하자는 말을 들었다. 너무나 짧게 본 것 같았는데 태왕릉으로 이동해야했다. 바로 옆이라 다시와서 볼수 있고, 태왕릉 자체도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이지만 잠깐 떨어지기도 아쉬웠다.
태왕릉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뒤 돌아 광개토태왕비에 시선이 갔다. 걸어간지 5분도 안되서 거대한 태왕릉이 모습을 들어냈다. 원래는 장군총과 유사한 모습이어야할 것인데 붕괴가 되어 저런 거대한 언덕처럼 되어 있다. 정말 큰 언덕과 같다.
태왕릉(太王陵)이 산처럼 안녕하고 악(岳)처럼 굳건하기를 바란다.-태왕릉 전명
태왕릉에 나온 벽돌에 적힌 말이다. 비록 무눠져 모습은 달라졌지만 무눠진 모습조차 산처럼 보였다.
광개토태왕비와 아주 가깝고, 이 무덤에서 "태왕"이라는 말이 나와서 태왕릉은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강하게 추측되고 있다. 혹은 부친인 고국양왕이나 다른 고구려왕으로 추측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확히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굉장히 거대한 고구려 왕의 무덤인것은 확실하다. 어제 산성하고분군에서 봤던 적석총들이 생각났다. 이 태왕릉은 붕괴되어 심하게 훼손 된 상태다. 그럼에도 어제 본 적석총보다 훨씬 큰게 한 눈에 보이니 과연 고구려 전성기 국력이 강해졌음이 느껴졌다.
너무 웅장해 광개토태왕의 무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무덤..하지만 무눠졌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특히 본인의 무덤이 영원토록 편안하기를 바란 광개토태왕의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더욱 그렇다. 태왕릉 전명에는 특히 굳건하기를 바란다고 적혔음을 생각하면 더 안타까웠다.
물론 고구려가 멸망하며 왕조가 끊긴 것 자체가 광개토태왕의 소망과는 거리가 있고, 후대인 입장에선 비석과 추정되는 무덤이라도 있는게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광개토태왕비때는 순순히 기쁨으로만 가득찼지만 왠지 모를 슬픈 감정이 들었다. 혹시 광개토태왕릉비에서 모든 감동을 다 부은 것일까.
이 즈음 중국공안이 슬슬 다시 움직였다. 심한 제제는 하지 않았지만 멀리서 감시하러 오는게 보이니 열이 올라왔다.
태왕릉이 무눠진 상태지만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갈수 있고, 태왕릉 내부로 들어갈수 있었다. 물론 촬영금지지만 이 곳에는 감시카메라도 없고 따라 온 공안의 거리도 멀어서 그냥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나를 분노캐 하는 광경을 보았다.
태왕릉 내부에 중국돈이 쌓여 있었다. 저 돈들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었다. 촬영도 제한을 두고 단순 대화도 통제하는 것들이 감히 태왕릉에 돈을 저렇게 뿌리고 간다는 그 사실에 너무 화가 났다. 관리라도 정말 철저히 하던가.
태왕릉에서 본 집안시 일대다. 이 곳에서 오회군 4호묘,5호묘,무용총등 유명한 고구려 무덤들이 다 보인다는데 그렇다면 태왕릉이 많은 무덤들의 핵심부인걸까..?적석총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지식을 쌓고 올걸..하는 아쉬움이 또 들었다.
태왕릉 앞에서 활을 쏘는 자세를 취했다. 사진을 찍는데 자세를 어떻게 잡지 하다가 문득 고구려 하면 활을 쏘는게 생각나 이렇게 찍었다.
가이드님이 중국공안을 따돌렸는지 공안이 전혀 보이지 않아 태왕릉 가까이에 갔다. 이 앞에서 "재밌게" 사진 찍으려고 백두산때 처럼 4족보행등 별 희한한 포즈를 했는데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추해보일꺼 같지만 광개토태왕이 보기엔 1600살 연하인 후손이 재롱부린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다.
사진에 나온것 처럼 이렇게 기단석이 크다. 내 키가 174인데, 호분석이 3m를 넘는 대형 바위다. 개인적으로 태왕릉이 광개토태왕의 무덤이라고 확신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무덤의 규모를 봐서는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서 손색이 없다.
재단 혹은 제사를 지내는 터 라고 한다. 이런 거 조차 남아있을거라 생각을 못했다.
이제 다시 광개토태왕비를 보러 가자는 목소리가 들렸다. 중국공안이 보이지 않아 태왕릉에 대해 슬쩍 고개를 숙인뒤 태왕비로 향했다.
처음에 찍은 사진 보다 좀더 잘 나오고 싶어서 태왕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후 누각안에서 계속 태왕비를 구경했다. 1면,2면,3면,4면을 보며 생각보다 비석에 글자가 크다는 것에 놀라며 계속 구경을 했다. 일행분들중에 전공자분들을 두고 나에게 광개토태왕비에 대해 여쭤보셔서 최대한 아는 대로 답변했지만 공부를 너무 안한지 오래되서 나 스스로 왠지 부끄러웠다. 앞으로 자기전 10분이라도 고구려사 책을 읽어야하나..
광개토태왕비를 보다가 시간이 5분정도만 남아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앞으로 장군총, 오회군 4.5호묘 다음날 봐야할 백암성까지 볼 것이 남아있지만, 이 곳을 벗어나기가 너무 아쉬웠다. 한 번더 고개를 돌려보며 "또 다시 언제볼까.."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까?" 라는 말을 입밖으로 되뇌였다.
"천제지자" 추모왕의 후손이자 "대왕"이라는 호칭을 받는 몇 안되는 우리 역사속 군주...나의 우상인 광개토태왕과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원래 무조건 모형을 살려했는데..왠지 퀄리티가 굉장히 안좋았다. 가격은 가격대로 비싸서 구매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나저나 도대체 이건 뭐냐? 광개토태왕비랑 저 괴상망측한것이 무슨상관이길래 이런걸 기념품숍에서 파는걸까?
기가 털리지맘 그래도 이 순간을 기념하고 싶어서 비석 모형 대신 고구려 수렵도 부채를 샀다. 단 돈 5천원.
장군총은 가깝지만 차를 타고 이동해야한다. 차에 오자 일행분들이 체리랑 딸기를 주셨다. 그 전 날 먹은 망고와 다르게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익숙한 음식 맛이 느껴지니 그제서야 내가 현실에서 광개토태왕비를 봤다는게 좀 믿겨졌다.
장군총은 태왕릉과 광개토태왕비로부터 차로 7분? 정도 걸렸다. 생각보다는 멀고 그렇다고 먼 거리는 아니었다. 들뜬 마음으로 이번에도 열심히 달려갔다.
내 눈앞에 장군총이 보인다. 가장 보존이 잘되고 가장 아름다운 고구려 적석총, 장수왕 혹은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측되어 유명한 고구려 무덤이다.
앞에서 볼때는 되게 상태가 좋아보여 기분이 좋았다. 내가 본 고구려 적석총중 가장 아름다워 보이고 웅장해 역시 고구려 태왕의 무덤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장군총 앞에 서니 왠지 모르게 한 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태왕릉보다 상태가 좋은 적석총이고, 개인적으로는 광개토태왕 무덤으로 장군총이 유력하다 생각해서 그런것일지 모르겠다.
장군총 기단석도 이렇게 크다. 태왕릉 기단석보다는 작아도 성인남성의 2배 높이고 이 기단석이 지탱해주는 무덤은 한없이 커보였다. 과연 고구려 적석총의 절정이다! 라고 생각하며 보던 차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장군총의 뒷부분 상태가 굉장히 심각했다. 먼저 중국을 다녀온 지인들이 근 시일내 장군총이 무눠질수도 있다고 했던게 허풍이 아니었다.
전반적인 모습을 보니 사태의 심각성이 체감됬다. 태왕릉처럼 형체가 남아있지 않게될수도 있다 생각하니 너무 끔찍하다.
이는 장군총의 배총이다. 무덤의 주인을 보호하는 무덤인데, 부끄럽게도 배총의 존재를 알게된건 불과 1년전이다.
광개토태왕비는 봤을때 한 없이 우러러 봤지만 다만 태왕릉과 장군총 무눠지거나 무눠지는 중이라 점점 서글퍼졌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1천년이 넘었기에 존재하는거 자체가 고맙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드는건 어쩔수 없었다. 고구려 왕 무덤을 보고 서글퍼질줄은 전혀 몰랐다.
그럼에도 대부분 역사를 좋아해도 이 곳까지 온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수많은 역사 덕후들이 광개토태왕,고구려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면서 정작 고구려 유적지를 못본 경우가 태반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중 하나였는데 이번기회에 한번이라도 봐서 정말 다행이다. 왠지 마음같아서는 절이라도 한번 올리고 싶었다.
순간 귀가에 장수말벌 날개짓 소리같은게 들려 놀랐다. 다행히 장수말벌이 아니라 드론이었다. 드론을 보자마자 이 근처에 드론을 띄우면 공안이 제제를 할 것인데 무슨 용자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 드론을 띄운 주체는 공안이었다. 한국인들이 그것도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듯한 사람들이 10명이상 있으니 드론 띄우고 감시를 하며 우리 일행을 사진 찍은 것이다. 정말이지 불쾌했다. 가이드님도 슬슬 가봐야 할 것같다 하셨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일이 커진다 해 장군총에서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이후 오회군4호묘,5호묘,통구사신총,우산하 211호,우산하 2110호,오히분2호묘 1호묘를 보러 갔다. 산성하고분군 처럼 바로 옆에서 보는것이 아니라 꽤 멀리서 보는데, 무덤들끼리 굉장히 가까워서 구분이 잘 안갔다. 옆에 있는데 4호묘인디 1호묘인지 구분이 안갔다.
저 무덤 보고 오회군 묘라고 했던거 같은데 고분벽화의 실물을 직접 보지 못해 안타까웠다.
내가 정확히 기악하는게 맞다면 저 곳이 집안박물관에서 본 오회군 5호묘다. 사신도와 수많은 신령과 용, 그리고 천장 가운데에 있는 황룡까지, 그 실물을 직접 보고 싶지만 요즘은 훼손을 막기 위해 볼수 없다. 내 사욕보다는 대의를 따른다는 심정으로 이해했다. 이 곳을 마지막으로 집안에서 고구려 답사를 마무리 하고 식사를 하러 갔다.
어제 저녁을 먹은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는 여전히 내 입맛에 맞았으며 식사를 마치고 이제 요양으로 떠나야 했다. 요양, 고구려 요동성이 있던 곳이자 고대 중국에게는 양평현, 거란에게는 동경 요양부였던 주요 도시다. 우리의 일정은 졸본에서 국내성, 그리고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마치 역사라는 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여정 속에서, 나의 발걸음과 고구려발자취와 겹쳐진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했다.
요양시로 가는길은 광활하게 펼쳐진 평지였다. 나 로서는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에 왔는지, 아직 집안 일대를 벗어나지 못했는지를 모르는 채로 넓은 이 땅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곳에서 수많은 고구려인과 발해인이 말을 타고 누볐을 것이 사뭇 떠올랐다. 그런 이 땅을 고려 말에는 최영 장군이, 조선 초에는 정도전이 이 땅을 되찾고자 했다. 이런 역사를 떠올릴 때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인에게 요동은 더 이상 우리의 옛 땅이라 부를 수 없는, 먼 타향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한때 우리 역사의 무대였다는 사실만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요양으로 이동하는 내내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계속 일렁였다.
첫 날도 신빈에서 밥을 먹었는데 다섯번 째 날도 신빈 휴게소에 왔다. 역시 누르하치의 고향이라 누르하치 동상이 휴게소에 존재한다. 여기서 데이터 문제때문에 알리페이가 결제가 되지 않아 카드로 결제하려 했으나 일절 받아주지 않았다. 다른 일행분이 대신 결제를 해주셨는데 정말 난감한 상황을 해결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장시간 동안 버스를 타니 몸은 뻐근하고 심심해졌다. 그때쯤 가이드님이 다들 한잔씩 하라고 북한 술을 가져왔다. 이 술 역시 40도였는데 왠걸, 맛있다.
북한에서 재배된 잣을 안주로 하며 술을 마시고 잠깐 잠이 들었다. 잠이 들고 꺠어났어도 아직 요양에는 도착을 하지 못한걸 인지한 나는 "고구려의 영토가 진짜 말도 안된다는 "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서 요양으로 5시간정도 이동하는게 걸리는데 고구려가 여기만 진출한것이 아니지않은가. 부여 지역인 농안 일대, 말갈7부가 있는 책성 일대 지역 심지어는 연해주 인근까지, 한반도로 진출하면 북한일대는 물론 경기,강원지역 일부까지에 심지어는 충주까지 내려왔었으니 이 나라를 보고 제국이라 하는게 납득이 됬다. 가끔은 세계사 공부를 하며 몽골,로마 혹은 통일 중국왕조와 비교하며 그렇게까지 안크다고 생각했지만 몸으로 체험하니 말도 안되게 큰 나라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저 나라들은..상상이 안간다.)
이 날 식사도 현지식이였는데 가장 맛있던 현지식이였다. 너무나 맛있는 나머지 사진도 안찍고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식사가 맛있어 이 날은 일부러 좀 술도 안피하고 더 먹었다가 이 날은 폭주하듯이 먹었다.
식사를 마무리 하고 호텔로 들어왔다.호텔 체크인을 하고내 방으로 들어갈때 쯤 내 캐리어에 달린 내 목베개가 떨어졌다. 방문을 제대로 고정하지 않고 술기운이 올라온 나는 캐리어를 문앞에 두고 문을 고정시킨뒤 목베개를 주으려 했다. 이런, 캐리어가 전혀 고정해주지 못하여 그대로 문이 닫혔다. 호텔 키를 방안에 둔 상태로 말이다. 아까 먹은 고량주들이 확 깼다. 가이드님이 오기전에 잠시 옆방에서 일행분과 잠깐 시간을 보내다 가이드님이 와서 무사히 해결되긴 했다. 술기운으로 안겪어도 될 일을 다 겪은 셈이다.
이후 김용만 소장님에게 저서를 들고가 싸인을 받았다.
사진으로 올린 새로쓰는 연개소문 전 이외에도 저 3책에다가 모두 받았다. 이후 고구려사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좀 하고 밖에서 야식을 먹으러 나왔다.
야시장에서 고른 야식은 마라어묵탕과 메추리 구이,양꼬치이다. 야시장 테이블에 앉아 용만소장님과 일행분들과 대화를 나눴다. 다들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행복하게 사는건 뭐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하는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아 나는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내 인생에 정답은 없겠지만 나는 공적인 삶을 살려는 인간도 아니니까 내 행복만 찾으면 될것 같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까. 고구려 역사를 깊게 공부하면 행복해질까? 그것으로 내가 내 삶을 영위할수 있을까? 정답이 없는 인생을 생각하니 막막하다.
야식을 먹고 잠시 내일 볼 요양백탑을 미리 보러 갔다. 거란이 세운 탑이지만 건축에 대해 무지한 나는 높다는 이유로 황룡사 9층목탑이 생각났다.
요양백탑을 구경한뒤 들어가서 잘까했는데..아직 술이 아쉬운 일행분들이 술을 더 먹자고 해서 사러나갔다.
밖에서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사고 들어왔다.
일행분들이 배불러서 못먹겠다는 맥주를 내가 이 날 다 마셨다. 저녁에는 고량주로 시작한 술이 새벽에 맥주 5잔을 비우며 마무리 했다. 술 기운이 올라오고 일행분들은 주무시러 가시고 나 홀로 남았다. 적당히 먹은걸 치우고 야경을 봤다. 드넓은 요동 땅, 아름다운 야경, 몸을 감싸는 술 기운까지 모두 내 마음속으로 섞여 들어가며 고구려 고토에서 마지막 밤이 마무리 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