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가능성은 한계가 없다.
90세에 자산이 1000억원인 노인이 있다. 과거에는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회장직에서 내려와 노후를 보내고 있다. 노인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 여태까지 살았던 과정, 사회는 노인을 세상에 없어서 안 될 존재로 생각한다. 누구나 우러러보는 존재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세월의 흐름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밖에서 보는 사람은 알 리 없다. 다리가 불편하고 움직이기도 버겁다. 생각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죽음이라는 문턱이 코앞까지 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젊었을 때는 가능성이 나에게 무한대로 펼쳐진 듯했다. 뭐든지 자신감이 있었고 사회를 정면으로 승부를 겨루면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90세로 나에게 남았을 가능성은 이제 흔들리는 희미한 불빛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누군가는 노인의 1000억이라는 자산을 부러워할 수 있다. 평생을 가지지 못할 꿈의 숫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이렇게 질문해 보고 싶다. 90세에 1000억을 가지고 싶은가? 아니면 20살에 무일푼의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 아마 대부분 선택은 부러워는 하지만 무일푼이더라도 20살에 가능성을 선택할 것이다. 돈이라는 숫자를 제외하면 명확하게 남는 건 시간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시간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며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도 반납해야 할 시간은 도래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다. 어린아이들은 시간 부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은 사실 한계가 없는 시간부자다. 우리는 부자로 태어나길 바라고 아이들도 부자가 돼서 행복하게 살아가길 기원한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을 비틀어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이미 시간 부자로 태어나있다. 아이들의 귀중한 시간의 가능성을 발견해주고 가꿔주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의 가능성은 한계가 없이 자라날 수 있다.
영화 <인 타임>에서 부자의 기준은 다르게 표현된다. 시간이 곧 부와 연결된다. 미래의 사람들은 돈으로 가치를 사는 것이 아닌 시간으로 내가 필요한 가치를 소비한다. 물건이나 음식 생명까지도 내 시간을 꺼내 사용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하루의 시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 벌이를 통해 겨우 시간을 벌어 살아간다. 하지만 부자의 시간은 다르다. 몇만 시간을 소유하며 영원한 삶을 산다. 내가 소유한 시간으로 모든 걸 살 수 있고 사회적 지위도 누릴 수 있다. 영원히 살게 되자 삶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바뀐다. 돈이 아니라 시간을 중심으로 영화를 그려나간 것이다. 돈보다 시간이 중요한 이유이다.
시간=곧 가능성이다. 시간이 많이 존재한다는 건 그만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난 기점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능성이 큰 나이다. 아이는 되고 싶은 걸 뭐든지 이뤄 나갈 수 있다. 아이들의 가능성은 한계가 없다. 그럼 우리 아이들의 출발점은 모두 부자로 시작하게 되는 이치다. 하지만 아이들의 가치 있는 시간을 주위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의 가능성의 한계의 범위는 확장과 축소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처럼 바뀔 수 있다. 만약 아이들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고 가능성이 범위가 확장된다면 시계추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바뀌게 된다. 반대로 아이들의 가능성이 내면에 잠자게 된다면 시계추는 축소의 범위로 급격하게 가라앉게 되게 된다.
과학고를 나와 카이스트에 입학한 공학도가 있다. 아이의 가능성을 처음 발견한 거 어머님이었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조립하고 만드는 걸 좋아했다. 나무젓가락만 가지고도 종일 무언가 뚝딱뚝딱 만들어내며 로봇도 만들어내고 장난감도 스스로 만들어내고 주변에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어머님에게 자랑했다. 어머님은 대견하다면 아이의 가능성을 눈여겨봤다. 하지만 집의 상태는 말도 못 했다. 아이가 종일 무언가 만들어내니 자칫 잘못 보면 잡동사니들을 집에 불러들이는 듯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이를 보는 안 몫은 남달랐다. 아이의 창의성에서 가능성을 들여다본 것이다. 집이 지저분해도 좋으니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만들어 보라고 응원했다. 아이는 그 보답으로 과학고를 졸업해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걸 무한대로 할 수 있는 카이스트에 합격하게 된다. 그리고 TV에 나와 자신이 카이스트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한 장의 사진이 뒤편 화면에 올라왔다. 엄청나게 지저분한 집이었다. 어떡해 저런 곳에서 살 수 있지? 라고 여길법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이가 무언가 만들다 남은 잔해이며 재료였다. 아이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때 부모님의 내가 하고 싶은걸 하게 해 줘서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항상 나의 가능성에 응원하고 칭찬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내가 좋아하는 창의성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스스로 가능성이 있고 없음을 판단하기 힘들다. 만약 아이 스스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도 부모님에게 어필하기란 쉽지 않다. 어휘 능력이나 판단 능력이 뛰어나지 않을 나이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부모가 아이들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한다. 가능성이 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데 이를 잘못 판단해 화를 내거나 하지 못하게 한다면 아이의 가능성은 급격히 축소되게 된다. 그리고 아이는 부모와 소통의 끈을 놓게 된다. 키즈카페에 가면 부모의 목소리와 아이의 표정만 보고도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부모가 아이의 행동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하고 모든 행동에 제약을 가한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조용히 아이를 설득시켜 이해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건 잘못된 행동이니까 다음부터 고쳐보자 알았지!” “실수해도 좋으니까 다음에는 이렇게 해볼까? 어때?” 아이들이 기죽지 않고 실수가 잘못된 게 아닌 실수를 고쳐나가면서 성장해 나간다는 느낌을 아이들에게 주어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아이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변해 있는지 정작 부모 자신조차 모르는 부모가 많다. 아이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면 부모에게 물어보기를 망설 이게 된다. 혼날까 봐 미리 겁을 먹어서이다. 아이의 심리로 풀어보자. “이거 물어보면 또 혼나겠지” “엄마는 내가 하는 것마다 짜증 내는 사람이야.”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어.” 아이는 점점 부모에게 질문하지 않고 가능성이 닫힌 “우울한 벙어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부모가 아이의 가능성을 닫아 버린 경우다. 아이들은 실수투성이다. 어쩔 수 없다. 수많은 실패와 실수 속에서 경험하고 성장해 나갈 수밖에 없다. 실패 없는 성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 말라는 이유도 명확해야 하며! 내가 귀찮으므로 하지 말라는 건 아이의 가능성을 말살 시키겠다는 것과 같다.
아이들은 조잘조잘 되며 쉴 새 없이 떠들어 대야 한다. 조용하면 어딘가 아픈 아이다. 조용하면 문제가 있다는 징후일 수도 있다.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아이야말로 정서적으로 건강한 아이다. 자기 생각을 표출하고 내 생각이 틀리더라도 혼내지 않는 가정 속에 자라난 아이가 자신만의 커다란 생각 주머니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가능성을 키워주는 부모인지, 가능성을 말살하는 부모인지, 나의 현재의 위치를 객관화 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만약 아이와의 소통에 있어 문제가 있다면 오늘이라도 고쳐나가면 된다. 문제는 고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부터 아이를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주기.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주기
아이의 생각 공유해보기
아이의 눈높이로 대화 해보기
오늘 하루는 무한 칭찬해보기
아이와 눈 마주치며 내 이야기도 해보기
아이의 가능성 찾아보기
오늘부터라도 하나씩 시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