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jubless Jun 14. 2019

너와 나에게 담긴 이야기

첫 혼숙 도미토리에서 생긴 일

나의 여행 패턴은 두 가지로 극명하게 나뉜다. 고요함 속에서 나 자신에게 집중하거나, 혹은 기약 없이 가벼운 Hello와 Bye의 북적임 가운데 서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아크로폴리스 신전 앞에서 큰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은 깍지를 낀 채 걷던 노부부, 플리트비체 숲 속에서 다 큰 딸 둘의 사진을 작가처럼 열심히 찍어주던 다정한 아빠, 비엔나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부둥켜안고 반가움에 울먹이던 부녀... 나만의 이야기가 있듯이 그들 또한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한 달 남짓 유럽 배낭여행을 하면서 나는 정말 내 가방을 안전하게 보관할 보관함만 있으면 숙소를 가리지 않고 잤었다.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는 여행이기에 최대한 아껴 쓰려고 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주로 여러 명이 함께 방을 쓰는 도미토리가 대부분이었으며, 한 번은 숙박 후기가 심지어 ‘더럽고 더럽고 더러웠다’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당최 겁이 많아 남녀 혼숙 도미토리는 꺼려져 동행이 있지 않는 한 홀로 숙박을 하진 않았다. 그러던 중 자그레브로 넘어가는데 예약을 늦게 한 탓인지 시내 근처의 적당한 가격의 호스텔에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나에게 남은 옵션은 혼숙 도미토리 혹은 호텔이었다. 물가에 비해 비싸고 위치가 좋지 않아 시내를 오가는 길에 고생할 호텔에 묵느니, 하루 눈 딱 감고 혼숙 도미토리에 묵어보자는 것이 내 최종 결론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내가 배정받은 방에는 몇 명이 묵고 있는지 빠르게 눈으로 스캔했다. 널려있는 청바지, 헝클어진 침대보 등으로 유추하자면 4명. 다행히도 내 윗 침대는 비어있는 듯했다. 가방을 침대 곁에 칭칭 동여매어 두고, 락커룸에 두고 갈 물건을 정리해 두고서 하루 종일을 걷다가 밤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혹시나 누가 있을까? 문을 열어보니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흔적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씻고 잘 준비를 하고 누워있는데 괜스레 잠이 오지 않았다. 크게 상관이 있겠냐만은 얼굴이라도 보면 덜 무서울까 싶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들어왔다. 키는 컸지만, 누가 봐도 많아봐야 20살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였다. 가볍게 인사하고는 그는 이내 무언가를 챙겨 나갔다. 앳되 보이는 청년 때문에 마음이 놓였던 걸까? 하루 종일 걸어 다닌 탓에 피곤했던 나는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 밝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밤새 불은 켜진 상태였나 보다. ‘여기 밤새 놀 곳이 있었던가?? 아무도 안 들어오면 나만 좋지’ 생각하고는 나는 하루를 더 연장하겠다고 말하고, 나갈 준비를 해서 나왔다.


저녁을 먹으러 가던 길. 호스텔에 두고 온 게 있어 잠시 들렀다. 4명 모두 어제 고단하게 놀았는지 한밤 중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왔다.


저녁을 먹고 다음 일정 결정 및 교통편을 알아보기 위해 조금 일찍 숙소에 들어왔다. 한 명은 이미 나간 듯 보였고, 어제 본 남자와 그 또래로 보이는 남자 그리고 여자가 외출 준비를 하는 듯했다. “Hi” 인사를 건네자 안녕이란 말과 함께 악수를 청해 얼떨결에 악수를 하게 되었다. 악수도 호의의 스킨십이라 했던가 그 때문인지 우리는 ‘어디서 왔니’를 시작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A: “어디서 왔니??”

J: “난 한국. 지금 유럽을 한 달째 여행 중이야.”

C: “좋겠네. 우린 크로아티아만 둘러보고 돌아가야 하는데...”

J: “너넨 학생이야?? 고등학교? 대학교?”

A: “이제 대학에 들어갔어.”

J: “그렇다면 너희에게도 이번 여행은 선물 같은 거겠네. 학교 입학 전 선물. 나도 20대의 마지막 선물의 의미로 유럽 배낭여행을 하고 있거든.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인터뷰도 볼 겸”

B: “선물? 그렇네 듣고 보니. 인터뷰? 무슨 인터뷰?”

J: “유럽여행도 여행이지만 승무원이 어릴 적 꿈이었어서 여행을 하다가 일정이 맞으면 가서 면접을 보고 있어.”

B: “우와, 대단하네. 그렇게도 할 수 있구나. 난 꿈을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제 찾아볼 거야. 근데 얜 노래를 정말 잘해서 가수가 될 거래.”

A: “왜 그런 걸 말해.”

J: “우와 멋진데? 그럼 나 미래의 슈퍼스타를 지금 만난 걸지도 몰라! Tv에 나오면 아는 척해야지!”

A: “하하, 아마도.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B: “그러지 말고 들려줘- 정말 잘하잖아.”

J: “정말?? 그래 들려줘. 나도 들어보자!!”


우리의 성화에 못 이긴 그는 이내 목을 가다듬었다. 그의 친구들은 많이 해 봤다는 듯 능숙하게 노래를 찾아주었다. 허스키하면서도 너무 굵지 않은 매력적인 음색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앙코르까지 외쳐서 우린 세 곡 정도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젠가 가수가 되어 TV로 보게 될 거라던 섹시한 보이스를 가진 남자 그리고 친구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중 불한당이 한 명이라도 있진 않을까 하여 불도 끄지 못하고 노심초사 잠들었던 나인데, 지금은 같은 방 안에서 침대에 걸터앉아 마주 보고 그중 한 명으로부터 노래를 듣고, 서로의 꿈을 응원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참 매력적이다. 오늘 내가 이 노래가 끝나고, 그들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벼운 Hello와 Bye를 고하게 될지언정 같은 ‘여행자’라는 공통점이 잠시나마 우리를 묶어준다. 그리고 서로가 가진 이야기를 꺼내놓게도, 경청하게도 만든다. TV에 나올 먼 훗날을 기대하며, 작은 관중인 나와 친구들 앞에서 정성껏 노래를 불러내던 그가, 그리고 숨죽여 경청하던 우리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내가 보내고 있는 매 순간이 어느 누군가에겐 극적인 순간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니 나의 여행이, 나의 시간이 그리고 나의 인연이 더욱 소중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 이름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